서궐(西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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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서쪽에 있던 경희궁의 별칭.

개설

조선후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로 인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쪽에 있는 경희궁을 서궐로 부르게 되었다. 동궐이라는 별칭과 마찬가지로 영조 때부터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29년(순조 29) 10월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순조 31)에 중건하면서 서궐이라는 명칭이 더욱 보편화되었다(『순조실록』 31년 4월 28일). 당시의 건축 상황을 기록한 유물로는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궐도안(西闕圖案)」, 1831년의 중건 공사를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등이 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궁궐 중 하나이다.

변천 및 현황

서궐인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에 궁궐 이름인 ‘경덕’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영조실록』 36년 2월 28일). 경덕궁 터는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풍수설 등을 비롯하여 광해군대에 신 궁궐 건설이라는 명목 하에 민가들과 같이 관에서 접수하여 경덕궁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1623년(광해군 15) 폐위되었기 때문에 경덕궁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인조는 즉위 후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 버리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경덕궁에서는 숙종이 탄생하였고,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영조·순조가 승하하였다. 1829년 10월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자 순조가 1831년에 다시 중건했는데, 서궐이라는 명칭은 이때 중건 공사를 계기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들은, 서궐의 건설은 광해군과 인조 집안 사이의 알력과 관련이 깊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광해군은 풍수를 다루는 술사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인경궁(仁慶宮) 영건 공사가 본격적인 단계에 이른 1617년(광해군 9) 6월에 어떤 술사가 새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있으니 새 궁궐을 짓자는 주장을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6월 11일). 새문동은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운종가와 만나는 지역인데, 여기에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定遠君)의 집이 있었다.

정원군은 인조의 생부로서 인조반정 이후 오랜 논란 끝에 원종으로 추숭된 사람이다. 정원군과 그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은 인망을 얻는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다가, 1615년(광해군 7)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고 그 집은 관에 몰수되었다. 광해군은 바로 그 터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술사의 말을 받아들여 궁궐을 짓기 시작하여 경덕궁을 완공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이상해, 『궁궐·유교건축』, 솔출판사, 2004.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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