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관란(徐觀瀾)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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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서관란 |
한글표제 | 서관란 |
한자표제 | 徐觀瀾 |
관련어 | 양호(楊鎬), 울산(蔚山) 전투, 정유재란(丁酉再亂), 정응태(丁應泰)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명 |
왕대 | 명 |
집필자 | 한지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호: 함벽(涵碧) |
성별 | 남 |
출신지 | 산서(山西) 택주(澤州) |
관력 | 급사중(給事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서관란(徐觀瀾)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7년 4월 23일, 『선조실록』 31년 12월 14일 |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관료.
개설
호는 함벽(涵碧)으로 산서(山西) 택주(澤州) 사람이다. 1589년에 진사가 되었고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과 병과급사중을 거쳤다. 정유재란 시기에 정응태(丁應泰)가 올린 보고문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1598년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가계
활동 사항
1598년 정응태가 경리(經理)양호(楊鎬)가 군공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탄핵문과, 조선과 일본이 통교했다는 보고서를 올리자 중국 조정에서 이 일을 조사하도록 파견한 자이다. 서관란은 1598년 9월에 흠차사감병과좌급사중(欽差査勘兵科左給事中)으로 나온 뒤 1598년 11월에 영남으로 내려가 군사들을 두루 돌아보고 기해년 정월에 다시 한양에 이르렀다가 2월에 돌아갔다. 서관란은 정응태와 친하게 지냈으나 그 뒤 군중에 직접 나아가 조용히 조사한 뒤 사실에 입각하여 보고한 결과 양호가 무사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조선이 일본과 통교했다는 무함에 대해서도 일일이 조목별로 해명하였으며, 한편에서 일본에 책봉과 조공을 허용하고 화의를 맺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음을 지적하며 그것의 부당함을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23일). 또한 그는 마귀(麻貴)가 군사를 통솔하는 데 절제가 없어 사졸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등자룡(鄧子龍)은 한가하게 머물러 있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았으며, 부양교(傅良橋)는 장수를 모욕한 무상한 자이고, 모국기(茅國器)는 일본인과 상통하여 의심스럽다고 하는 등 울산 전투의 군공 조작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2월 14일).
참고문헌
- 『매호유고(梅湖遺稿)』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사(明史)』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산서통지(山西通志)』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鄭潔西·楊向豔, 「萬曆二十五年的石星·沈惟敬案―以蕭大亨《刑部奏議》爲中心」, 『社會科學輯刊』, 遼寧省社會科學院,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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