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방방의(生員放榜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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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중 소과(小科)의 하나인 명경과(明經科)의 급제자를 발표하는 의식.

개설

조선시대 과거에서 소과는 명경과와 진사과(進士科)로 나누어지며, 전자의 합격자를 생원(生員), 후자의 합격자를 진사(進士)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 명경과는 국초부터 중단 없이 시행되었지만 진사과는 1395년(태조 4)에 폐지되었다가 1438년(세종 20)부터 재개되었다. 이에 따라 세종대에 정비된 의례가 수록된 『세종실록』 「오례」에는 생원방방의(生員放榜儀)만 실려 있고, 진사과가 재개된 이후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생원진사방방의(生員進士放榜儀)로 바뀌어 수록되었다.

연원 및 변천

생원의 방방(放榜) 절차가 처음 논의된 것은 1396년(태조 5) 5월로, 당시 예조(禮曹)에서는 생원시(生員試)에서 경서(經書)의 의(疑)·의(義)를 각각 한 문제씩 시험하여 100명을 선발하고, 고려시대 진사시(進士試)의 예에 따라 시험장 앞에서 방방할 것을 건의하여 태조의 재가를 받았다(『태조실록』 5년 5월 6일). 이 규정에 따라 같은 해 6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태조가 참여한 가운데 이수(李隨) 등 99인의 생원을 방방하였다(『태조실록』 5년 6월 1일). 한편 태종대에는 생원 합격자를 축하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라 하여 금주령 기간 중에도 생원방방 후 3일간은 금주를 중지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16일).

1435년(세종 17) 2월에는 예조에서 생원방방 시의 의주(儀註)를 수정하여 올렸으며(『세종실록』 17년 2월 25일), 여기에 일부 내용이 수정·보완되어 『세종실록』 「오례」의 생원방방의로 최종 정리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생원 방방의).

1438년부터 진사시가 재개되면서 진사시는 예조와 집현전(集賢殿)에서, 생원시(명경과)는 예조와 성균관(成均館)에서 주관하였다. 이에 1453년(단종 1) 의정부(議政府)에서는 두 시험의 주관 기관이 달라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진사시·생원시를 예조·집현전·성균관이 함께 관장하여 날을 걸러 시험을 치르고 방방은 같은 날에 할 것을 건의하였다(『단종실록』 1년 1월 24일). 그리고 이 건의에 따라 같은 해 9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생원과 진사의 방방을 함께 실시하였다(『단종실록』 1년 9월 6일).

1483년(성종 14) 2월에 성종은 생원·진사의 방방 의식에 왕과 시신(侍臣)들은 참석하는데 문무백관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영돈령(領敦寧) 이상의 고위 관료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에 일부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을 고쳐 백관이 참석하게 할 것을 주장했고, 일부는 생원·진사는 문·무관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구례(舊例)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성종실록』 14년 2월 27일). 결국 『국조오례의』의 규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546년(명종 1) 4월에 예조에서는 국상 중의 생원방방에 관한 계목(啓目)을 올렸다. 계목을 통해 예조는 1469년(예종 1)의 사례에 의거하여 근정전에 왕의 허좌(虛座)를 설치하여 방방의를 시행할 것, 생원·진사는 백의(白衣)에 흑두건(黑頭巾)·흑대(黑帶)를 착용할 것 그리고 축하 연회를 금할 것 등을 건의했고, 명종은 이를 수용하였다(『명종실록』 1년 4월 17일). 한편 1747년(영조 23)에는 방방에 참여한 생원·진사에게 처음으로 연건(軟巾)과 난삼(襴衫)을 착용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3년 2월 20일).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 「오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원방방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근정전에서 방방의를 거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식 1일 전에 액정서(掖庭署)에서 근정전에 어좌(御座)·급제자 명단을 놓는 상인 방안(榜案)·급제증서를 놓는 상인 백패안(白牌案)·향안(香案) 등을 설치하고, 전악(典樂)은 의식에서 연주할 악기를 배치한다.

의식 당일에 전의(典儀)가 방방의에 참여하는 집사관(執事官), 시신(侍臣), 기타 관원들과 생원 급제자들의 자리를 배치한다. 시신과 관원들은 공복(公服)을 입고 조당(朝堂)에서 대기하다가 신호에 따라 근정전으로 나아가고, 급제자들은 연두건(軟豆巾)과 청의(靑衣)를 착용하고 광화문(光化門) 밖에 있다가 신호에 따라 홍례문(弘禮門)을 거쳐 근정문 밖의 자리로 나아간다. 왕의 행차가 근정전에 도착하여 왕이 어좌에 오르면, 전의의 인도에 따라 시신과 관원들이 왕에게 사배(四拜)를 한다.

방방관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서면 승지(承旨)가 왕에게 방방의 시작을 아뢴 다음 방방관에게 가서 급제자 명단을 전달한다. 방방관이 급제자의 이름을 수석부터 차례대로 1명씩 부르면 호명된 급제자는 근정전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로 나아간다. 급제자들이 모두 들어온 다음에 왕에게 사배를 한다.

예조 정랑(正郎)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서면 승지와 내직별감(內直別監)이 교지와 백패함을 받들고 예조 정랑에게 가서 전달한다. 백패함을 받은 예조 정랑은 급제자들에게 백패를 나누어 준다. 그 다음에는 사준원(司罇院)에서 주관하여 급제자들에게 주과(酒果)를 내려준다.

합격자들은 통찬(通贊)의 지시에 따라 왕에게 사배를 한 다음 봉례랑(奉禮郞)의 인도를 받아 밖으로 나간다. 시신과 관원들도 통찬의 신호에 따라 왕에게 사배를 한다. 판통례(判通禮)가 왕에게 예식이 끝났음을 알리면 왕이 어좌에서 내려와 여(轝)를 타고 사정전(思政殿)으로 들어가며, 시신과 관원들도 봉례랑의 인도를 받아 밖으로 나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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