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간(生鮮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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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거주하며 임금 및 대궐 안의 식사를 관장하던 사옹방에 생선을 진상하는 역을 담당하던 자.

개설

생선간은 일반 양인이었지만 군역을 지지 않고 사옹원에 생선을 진상하는 것을 신역으로 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한강변에 거주하던 양인에서 차출되었다.

생선간의 구성

처음에는 한강 주변에 거주하는 어부로서 가을두(현 양화진 근처)에 19명, 서강에 4명, 독음포(현 옥수동)에 12명씩 골라 생선간에 배정하였다. 이후 1441년(세종 23)에는 한강에서 통진까지 강변에 사는 양인이나 천민 중에서 100호를 뽑아 3번 교대로 생선간의 역을 수행하는 대신,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1447년(세종 29)에는 그 수를 120호로 늘려 생선간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특정한 물자를 공물로 바치거나 특정한 기관에 신역을 제공하도록 뽑힌 장정 중에 ‘○○간’이라 불리는 자가 많았다. 이들은 노비가 아니면서도 특정한 기관에 예속되어 정해진 역을 바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양인 신분이었지만, 천한 역에 종사하였고,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도 세습되었다. 이른바 신량역천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간주하면서도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또 세습하면서 천한 역에 종사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모순이 있었다. 또 호적과 군적이 정비되면서 공노비나 일반 양인 중에서도 ‘○○간’이 부담하던 역에 차정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따라서 ‘○○간’을 폐지하고 일반 양인으로 대체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1415년(태종 15) ‘○○간’을 모두 보충군에 편입시키고, 일반 양인과의 구분을 없애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들에게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역도 세습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면서 군역이 아닌 특수한 역을 지는 자들을 ‘○○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강변에 거주하면서 사옹원에 생선을 진상하던 생선간이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생선간은 세종대에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일반 양인으로, 굳이 천역으로 비춰지는 생선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합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문종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호칭도 생선간에서 어부(漁夫)로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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