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토진(上土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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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강계부 동북쪽의 상토에 설치한 진.

개설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동북쪽에 있는 상토(上土)는 만주 방면에 살았던 여진족인 건주야인의 땅과 인접해 있어 방어가 긴요했다. 특히 단종대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의 3군(郡)을 철폐하고, 이어 1459년(세조 5) 자성(慈城)까지 폐지하면서 상토는 적이 침입하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 되었다. 이에 1460년(세조 6) 구자만호가 설치되었다. 구자만호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한 작은 규모의 방비 시설인 구자를 지키던 종4품의 무관직이었다. 상토구자는 중종대에 진으로 승격하면서 종3품의 무관직인 첨사가 파견되었다. 상토진은 정조대에 그 위치를 자성군의 곤장평(昆長坪)으로 옮겼다가 고종대에 혁파되었다.

위치 및 용도

상토진은 평안도 강계부의 동북쪽에 있다. 상토진 북쪽에는 자성이 있다. 자성에서 상토까지는 72리(약 28㎞)이다. 상토진에서 북으로 15리(약 9㎞) 남짓 떨어져 있는 마전령(麻田嶺)이 있다. 건주야인이 자성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상토령(上土嶺)을 넘어야 했다. 상토와 영변부(寧邊府)와의 거리는 6백여 리(약 236㎞)였다. 상토와 압록강과의 거리는 1백여 리(약 28㎞)였다. 상토와 오만진(五萬鎭)과의 거리는 30리(약 12㎞)였다.

상토는 건주야인의 땅과 잇닿아 있어 방어가 매우 중요한 곳으로 평안도의 방어처소(防禦處所)였다. 상토는 추파(楸波)·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의 3구자와 더불어 압록강을 따라 나란히 배치된 구자였다. 상토는 거진(巨鎭) 강계부(江界府)에 속했다. 외질괴(外叱怪)는 상토가 관할하였다.

무창·여연·우예와 더불어 1459년(세조 5) 1월 자성까지 혁파함으로써 4군이 모두 폐지되었다. 이때에 자성의 백성들은 인근의 상토와 만포와 와동(瓦洞)으로 옮겨졌다. 폐사군 이전 자성에서는 늘 야인들을 정탐해왔으나, 자성을 혁파한 뒤로는 일대의 땅이 야인이 유렵(遊獵)하는 곳이 되었다(『성종실록』 16년 7월 26일). 상토와 자성 근방에서는 조선인과 야인들이 섞여 살며 어렵을 했다.

변천 및 현황

자성 이상의 여러 고을을 혁파한 이후 방어처소로서의 상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1460년 2월에 구자만호가 설치되었다. 상토구자만호는 중종대 후반 첨사가 파견되는 진으로 승격되었다(『중종실록』 38년 12월 27일). 특히 상토첨사에 당상관이 차출되기도 했다. 상토진은 1796년(정조 20) 9월에 곤장평으로 옮겨 설치하고, 강계방어영(防禦營)중군(中軍)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상토진의 옛터에는 1815년(순조 15) 3월에 강계의 종포진(從浦鎭)을 옮겨 설치하도록 했다(『순조실록』 15년 3월 15일). 그러다가 1868년(고종 5) 11월 상토첨사의 칭호만 남겨 두고 별중군(別中軍)의 직함으로 호예(湖芮)에 이속시키도록 하면서(『고종실록』 5년 11월 9일) 1869년 10월 상토진을 혁파하여 자성군수(慈城郡守)로 올려 변지로 만들었다(『고종실록』 6년 10월 13일).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1528년(중종 23) 10월 상토진에 야인들이 침입했다. 1548년(명종 3) 9월 상토진에서 1식(약 12㎞) 정도의 거리에 있는 큰 재 아래의 나무숲 사이에 움막을 짓고 산삼을 캐는 호인(胡人) 5명이 조선 군사를 협박하여 충돌한 적이 있었다(『명종실록』 3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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