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지패(尙州之敗)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상주지패 |
한글표제 | 상주지패 |
한자표제 | 尙州之敗 |
동의어 | 상주(尙州) 전투 |
관련어 | 이일(李鎰), 임진왜란(壬辰倭亂), 제승방략(制勝方略)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발생시기 | 1592년(선조 25) 4월 23일 |
발생장소 | 경상북도 상주 |
관련 인물/집단 | 이일(李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상주지패(尙州之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경상도 상주에서 일본군과 싸워 패한 전투.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 등을 함락한 후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을 경상도로 파견하였다. 그가 1583년에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진압했던 만큼 일본군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지역 방어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제승방략은 유사시 중앙에서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파견되고, 지방의 군대는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제승방략체제는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때문에 상주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군의 침략 소식이 조선 조정에 처음 알려진 것은 1592년 4월 17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선조와 신하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누어 도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을 막기 위해 이일로 하여금 경상도를 방어케 했고, 신립(申砬)을 충주로 파견하였다.
발단
이일은 300여 명의 병력을 선발하여 출전할 생각이었지만, 병사들이 모이지 않아 3일이 지난 후에 겨우 60여 명의 군관(軍官)만을 인솔하여 조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경상도 지역 군사들 역시 상주로 집결하고 있었다. 관군의 1군은 솔령장(率領將)김준신(金俊臣), 2군은 상주목사김해(金澥)와 함창현령 이국필(李國弼), 3군은 상주판관 권길(權吉) 등이 지휘했는데, 이들 군사는 각 1,000명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김준신이 거느린 군사는 전투병력, 김해 등이 거느린 군사는 수송부대, 권길이 인솔한 군사는 전투병력과 수송병력이 혼재해 있었다. 1군과 2군은 이일의 지휘를 받을 예정이었고, 3군은 경상우병사의 예하 부대로 편성키로 되어 있었다.
4월 20일 도성을 출발한 이일은 23일 상주에 도착하였다. 이일이 도착할 당시 상주목사김해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상태였다. 판관권길이 성을 지키고 있었지만 군사는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이일은 권길에게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하려 했지만, 권길과 김준신은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했고, 권길과 김준신은 400~500명의 백성을 모아 군사로 편성하였다. 한편 이일은 청주에 주둔 중인 충청방어사변기(邊璣)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경과
4월 24일 조선군 수뇌부는 일본군과의 전투계획을 논의했다. 권길과 김준신은 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이일은 상주성 밖 넓은 개활지인 북천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조선군은 북천으로 이동하여 진영을 구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조선군이 북천에서 군사훈련 중일 때 한 백성이 이일에게 일본군이 상주에 들어왔음을 알렸다. 하지만 이일은 군대를 동요시키고 백성을 두렵게 한다는 이유로 그 백성을 참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일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일본군은 24일 저녁 아무도 지키지 않는 상주성을 점령해 버렸다.
4월 25일 새벽 지원 요청을 받은 변기가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일의 진영에 합류했다. 이일이 변기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일본군은 좌·우 양쪽에서 조선군을 급습하였다.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조선군은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종사관박호(朴箎)와 윤섬(尹暹) 등은 전사했으며, 패색이 짙어지자 이일은 도주하였다(『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전장을 탈출한 이일은 문경에서 패전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신립이 주둔하고 있는 충주로 이동하였다.
상주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뿐 아니라 산으로 피신한 조선인 수천 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함께 사로잡은 통사(通事)경응순(景應舜)을 보내 교섭을 요구했다. 전투 다음 날인 26일 일본군은 문경을 점령하였고, 조령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경상도 지역을 장악하고 충청도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징비록(懲毖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上, 신현실사, 1977.
- 김성우, 「임진왜란 초기 제승방략전법의 작동 방식과 상주 북천전투」, 『한국사연구』163, 한국사연구회,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