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목(尙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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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중심 시가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상주목(尙州牧)은 사벌국(沙伐國)에서 기원하며, 신라 때는 사벌주(沙伐州)·상주(上州)·상주(尙州) 등으로 차례로 불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9주 중 하나인 상주(尙州)의 주치(州治)로 중시되었다. 주치로서의 상주는 세 곳의 영현(領縣)을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상주목으로 편성되어 24곳의 속군현(屬郡縣)을 관할하는 대읍이자 계수관(界首官)으로 중시되었다. 상주는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이 상주목으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는 상주를 포함하여 목이 단 세 곳밖에 없었으므로 상주의 지역적 중요성은 높게 평가되었다. 상주목에는 목사(牧使)가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판관(判官)과 교수(敎授) 등이 함께 파견되었으나, 후기에는 두 직책이 모두 폐지되었다. 상주에는 1408년(태종 8)경부터 1593년(선조 26)까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위치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상주목은 상주군(尙州郡)이 되어 23부의 하나인 안동부(安東府)의 관할하에 편성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상주군은 경상북도의 1등군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상주목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중심 시가지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상주목은 사벌국이 있던 곳으로 신라 첨해왕 때 사벌주로 편성하였다. 524년(신라 법흥왕 11)에 상주(上州)로 되었으나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주를 폐지했다가 687년(신라 신문왕 7)에 다시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상주(尙州)로 개칭하고 세 곳의 영현을 거느렸으며, 광역 행정단위로서 9주의 하나인 상주의 주치로 중시되었다. 한때 사벌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건국 후인 940년(고려 태조 23)에 상주로 환원되었으며, 이후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가 되었다. 983년(고려 성종 2)에 12목을 설치할 때 상주목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12주 절도사(節度使) 중 하나인 귀덕군(歸德軍)으로 편성되었으며, 10도 중 하나인 영남도(嶺南道)의 대표 고을이 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014년(고려 현종 5)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이 된 이래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상주목으로 불렸다.

조직 및 역할

상주목은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687년(신라 신문왕 7)에 상주(上州)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757년에 상주(尙州)로 개칭되어 신라 9주 중 하나인 상주의 주치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상주에는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이 파견되었다. 당시 상주는 청효현(靑驍縣), 다인현(多仁縣), 화창현(化昌縣) 세 곳의 영현을 직접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몇 번의 읍격 개정이 있었으며, 1018년에 상주목으로 고정되어 조선시대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에 상주는 24곳의 속군현을 거느리는 대읍으로 성장하였으며, 경주 및 진주(晉州)와 함께 경상도의 세 곳 계수관 중 한 곳으로서 높은 위상을 지녔다. 상주는 고려시대에 계수관으로서 안동부(安東府)와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원)의 관할 영역을 포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상주목으로 편제되었으며, 목사가 파견되는 등 지역 중심지로서의 상주목의 역할과 비중은 여전히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 목사가 임명된 고을은 상주와 진주, 성주(星州) 단 세 곳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 상주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상주에는 목사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상주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상주목에 정3품의 목사와 종5품의 판관(判官),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상주목에는 정3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목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200명, 인리(人吏) 71명, 지인(知印) 14명, 사령(使令) 24명, 군뢰(軍牢) 25명, 관노(官奴) 23명, 관비(官婢) 20명이 편성되었다. 즉 판관과 교수는 이때에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상주에는 정3품의 목사가 임명되는 것으로 돼 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상주의 호수가 1,845호, 인구는 3,13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상주목의 호수가 18,416호, 인구는 70,021명으로, 그중 남자가 33,897명이고, 여자가 36,124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상주에 24개의 면과 832개의 리가 있으나, 『여지도서』에는 30개의 면이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에 실린 24개 면은 내동면(內東面)·내남면(內南面)·내서면(內西面)·내북면(內北面)·중동면(中東面)·단동면(丹東面)·단남면(丹南面)·외동면(外東面)·장천면(長川面)·청동면(靑東面)·청남면(靑南面)·공동면(功東面)·외남면(外南面)·모동면(牟東面)·모서면(牟西面)·화동면(化東面)·화서면(化西面)·화북면(化北面)·은척면(銀尺面)·외서면(外西面)·외북면(外北面)·영순면(永順面)·산남면(山南面)·산동면(山東面) 등이나, 『여지도서』에는 단북면(丹北面)·단서면(丹西面)·공서면(功西面)·중북면(中北面)·산서면(山西面)·산북면(山北面) 6개 면이 추가로 더 실려 있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상주목의 호수는 18,667호, 인구는 70,497명으로, 남자는 33,292명, 여자는 37,205명이었다. 1910년(순종 4)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상주의 호수는 21,204호, 인구는 102,988명으로, 그중 남자가 53,850명, 여자가 49,138명이었다. 조선시대에 상주목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 상주목으로 편성된 이래 조선시대에도 상주목의 읍격과 지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조선전기는 물론 조선후기에도 상주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고려시대 이래 경주에 위치하던 경상감영이 조선 건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408년경에 상주로 이전하였다. 1519년(중종 14)과 1592년(선조 25)~1593년(선조 26)에 일시적으로 경상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을 때에는 상주가 경상우도의 감영 소재지가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상주에 위치하던 경상감영이 1593년에 성주(星州) 팔거현(八莒縣)으로 이전하면서, 상주에는 더 이상 감영이 위치하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상주목은 상주군이 되어 안동부의 관할 영역에 포함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상주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1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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