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희(尙可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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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이 입관 이전 투항한 명군 장수 중 하나로, 오삼계·경중명(경중명 사후에는 그의 아들 경계무)과 함께 삼번의 하나로 비정되는 인물.

개설

상가희는 본디 명의 장수였으나 투항하여 지순왕(智順王, bodohonggo ijishūn wang)에 봉해졌으며, 입관(入關) 이후에는 평남왕(平南王, julergi be necihiyere wang)에 봉해졌다. 광주(廣州)에 번부(藩府)를 개설하고 삼번(三藩)을 구성하였으나, 이후 발생한 삼번의 난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가계

조부인 상계관(尙繼官) 때에 해주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은 동강유격(東江遊擊)상학례(尙學禮)이다.

활동 사항

상가희는 동강총병(東江總兵)황룡(黃龍)의 부하로, 조선의 기록에서도 그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인조실록』 7년 11월 2일). 1632년에는 광록도부장(廣鹿島副將)에 임명되었지만, 내부 모함 때문에 1634년 후금에 귀순하였다. 이후 총병관에 임명되었고 1636년에는 지순왕으로 봉해졌으며, 한군(漢軍) 양람기(鑲藍旗)에 배속되었다.

1644년 입관 후 이자성(李自成) 세력을 토벌하였으며, 1649년 평남왕에 봉해진 뒤 남명 세력을 진압하였다. 1656년 광주에 번부를 개설하여 1662년에는 복주(福州)의 경계무(耿繼茂)와 곤명(昆明)의 오삼계(吳三桂)와 함께 삼번으로 불리었다.

이후 1673년 상가희가 맏아들에게 왕작을 세습하고 귀향하고 싶다고 청원하자, 강희제(康熙帝)가 상가희 일족 전체의 요동 귀환을 명한 일을 단초로 삼번의 난이 발생하였다. 반란 참여를 거부하던 상가희는 1676년 맏아들 상지신(尙之信)에 의하여 유폐되어 병사하였다. 당시 삼번의 난을 주시하던 조선도 이를 기록하였다(『숙종실록』 2년 12월 23일).

상훈 및 추모

상지신이 항복한 1677년(강희 16) 경(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최동권 외, 『만주 팔기 증수의 일기』, 박문사, 2012.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양휘웅 역,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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