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부(三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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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삼화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삼화부(三和府)는 북방의 군사적 요충지로 1686년(숙종 12)에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어 12개의 속현을 다스렸다.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삼화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비변사에서 북방의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평안도관찰사의 장계(狀啓)를 받아 삼화현(三和縣)을 삼화부로 승격시켜 청남방어사(淸南防禦使)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우산(牛山)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삼화부는 고려시대에 현으로 출발하여 종5품의 현령을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현령과 훈도 각 1인을 두었다가 1686년(숙종 12)에 삼화부로 승격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어 청남방어사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12개의 속현을 다스렸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삼화부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3명, 각고 감관 5명, 각창 감관 4명, 중군 1명, 마병별장 1명, 천총 3명, 파총(把摠) 5명, 기고관(旗鼓官) 2명, 교련관 2명, 군관행수 3명, 병방 7명, 초관 26명, 향리 6명, 가리(假吏) 34명, 통인(通引) 24명, 사령 15명, 군뢰(軍牢) 28명, 기수 16명, 관노 48명, 관비 32명이 있었다. 독진(獨鎭)으로 방영에 소속된 관원으로는 기고관 2명, 교련관 2명, 별무사장 2명, 장무관 2명, 연대별장 2명, 방영고 감관 1명, 영리 1명, 계서(啓書)가 있었다.

변천

삼화부는 고려시대 1136년(고려 인종 14)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 4도를 해체하고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 의 6개 현으로 분리할 때 금당부곡(金塘部曲), 호산부곡(呼山部曲), 칠정부곡(柒井部曲)을 합쳐서 삼화현으로 설립하여 현령을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1686년(숙종 12)에 북방의 변방을 강화하기 위해 평안도관찰사의 장계를 받아들여 삼화현을 삼화부로 승격하고 종5품의 현령에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숙종실록』 12년 6월 13일).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삼화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