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전(三學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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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중기 때 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1671년(현종 12)에 지은 삼학사(三學士)의 전기(傳記)다.

개설

이 책은 현종 때 송시열이 편찬한, 홍익한(洪翼漢, 1586~1637)·오달제(吳達濟, 1609~1637)·윤집(尹集, 1606~1637)의 전기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을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여 청(清)나라에 굴하지 않다가 화를 당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홍익한·윤집·오달제 세 사람을 ‘삼학사’라 일컫게 된 것은,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지은 이후부터이다. 병자호란 당시 홍익한은 이미 52세로 언관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윤집·오달제와 함께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세 사람이 지향한 바가 같았고,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했으므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병자호란 당시 ‘부박하여 이름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반세기 후 송시열에 의해 충신·열사로 평가를 굳힌 후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국가적인 현창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들에 대한 인적 사항은 이 『삼학사전』에 의거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본문에는 삼학사의 전기와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이 올린 ‘척화소(斥和疏)’의 주요 내용과 중국 선양(瀋陽)에서의 심문 내용도 수록하였다. 병자호란 전후 대청관계와 척화파 지식인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삼학사가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국내적으로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시기이다. 국제적으로는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후금(後金)이 발흥하는 등 격변기였다. 그러한 격동기 속에서 세 사람의 일생도 풍파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학사 중 가장 연장자인 홍익한은, 1586년(선조 19년) 11월 22일에 진사홍이성과 생원김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신의가 있었고, 독서를 업으로 삼았다. 또한 절의에 죽는 사람들을 숭상하였다.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정구는 그를 가리켜, “다른 날에 반드시 위인이 될 사람”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고령현감으로서 도성을 구원하기 위해 상경했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며, 이듬해에는 사간원 정언으로서 강홍립(姜弘立)이 후금에 항복하여 고국을 해친 죄를 엄히 다스리기를 청하기도 했다.

윤집은 1606년(선조 39년) 현감윤형갑과 관찰사황치경(黃致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31년(인조 9년) 26세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시강원 설서, 사서가 되었고,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인조 13년) 30세 때 홍문록에 새로 등록되어, 홍문관원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 부교리, 이조 좌랑,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오달제는 삼학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1609년(광해군 1년) 오윤해(吳允諧)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이다. 1627년(인조 5년)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6세 때인 1634년(인조 1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윤집과 함께 홍문록에 오르고,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1636년(인조 14년) 홍문관 부수찬, 수찬, 부교리가 되었다.

삼학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 사람이 다 기호학파에 속하는 서인(西人)의 일원이고, 청요직을 두루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홍익한의 출세가 조금 늦다는 차이는 있지만, 이는 광해군 대에 출사가 가로막힌 것과 집안이 비교적 한미했던 탓이 크며, 인조 대에는 세 사람이 모두 청요직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더 많다. 특히 윤집과 오달제는 병자호란 직전에 홍문록에 선발된 젊은 엘리트 관료로서, 앞날이 창창한 인재들이었다.

서지 사항

1책(5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연세대본)이다. 16행 22자 내외의 무계, 주쌍행(註雙行), 무어미(無魚尾)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21.3×20.4cm이며, 규장각,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이듬해 심양에 잡혀가 죽은 홍익한·윤집·오달제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한 것이다. 규장각 도서 필사본에는 저술 연도를 1674년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또, 삼학사와 관계없는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보낸 칙유(勅諭), 윤봉구(尹鳳九)가 지은 송시열의 묘지문, 왕세손(후의 정조)의 상소문과 1776년(정조 즉위년)의 친제문(親祭文) 등이 합편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정조 때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며, 필사하는 과정에 다소 착오가 있어, 자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 책은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순으로 그들의 약전(略傳)과 언행을 기록하고, 잡혀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기까지 조정의 의논과 대청관계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기록하였다. 또, 본문에는 그들이 올린 척화소의 중요 부분과 심양에서의 심문 대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 요지는 모두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의 의리를 강조한 것이다. 즉 천하의 유일하고, 진정한 정통은 명조(明朝)에 있으며, 천자를 참칭하는 청나라는 이적(夷狄)의 나라이므로, 교류할 수 없기에 강화를 맺거나, 항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는 실상 저자 송시열 자신의 신념이었으므로, 삼학사의 언행 중에서 특히 강조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절의에 죽은 그들의 가족과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황일호(黃一皓) 등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또, 강화도에서 죽지 않았다 하여, 뒤에 저자가 비난한 윤선거(尹宣擧)를 이 책에서는 깨끗하게 지조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 주목된다.

또한 신종의 사당을 세워 효종을 배향하고, 그 묘정에 삼학사를 종향하려는 저자의 뜻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효종의 북벌 계획이 있은 뒤 조선에 풍미했던 존주사상(尊周思想)의 동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피전자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명성과 춘추대의(春秋大義) 및 유려한 필치에 힘입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전기 작품이 되었다. 『삼학사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의 사육신에 필적할 만큼 그 피전자들을 조선 후기 최고의 충신의사로 추앙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김일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기」, 『한국문학연구』 제2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3.
  • 김일환, 『병자호란 체험의 '재화' 양상과 의미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박도균, 「尤庵 宋時烈의 文學에 나타난 春秋大義의 形象」, 경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박양리, 『병자호란의 기억, 그 서사적 형상과 의미』, 부산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