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三田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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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종전 후에 청나라 측의 강요로 세운 청나라 태종의 공적비(功績碑).

개설

삼전도비는 1639년(인조 17) 12월에 청나라 측의 요구로 ‘수항단(受降壇)’, 즉 병자호란 종전 시 조청(朝淸) 간에 종전 의식이 거행된 장소에 세운 청나라 태종의 공적비였다. 비문은 청나라의 조선 출병 이유, 조선이 패배를 인정하는 과정, 청나라 태종의 관대한 강화 조건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연원 및 변천

인조 정권이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자 1636년 12월에 청나라 태종이 120,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쳐들어 왔다. 10여일 만에 청군에게 한양을 빼앗긴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청나라는 강화 후에 주력 부대는 철수하였지만 마부대(馬夫大)로 하여금 인조의 강화조약 이행 여부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1637년 3월에 비변사는 청에서 비석의 건립을 독촉하기 전에 먼저 서두르는 것이 청나라의 의심을 받지 않는 길이라고 하였지만, 인조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항복 의식에서 실추된 권위를 더 이상 손상하고 싶지 않아서 망설였지만, 비석 건립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1637년 6월 26일에 수항단에 비석 세울 자리를 돋우고 비각 건립을 시작하였다(『인조실록』 15년 6월 26일). 그해 11월에 청나라의 사신이 공사 현장을 방문할 것에 대비해서 공사를 서둘렀다. 마부대는 조선 측에서 쓴 비문을 심양(瀋陽)에 보내서 점검 받기를 요구하였다. 조선은 장유와 이경석이 작성한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는데 그중에서 이경석의 비문을 고쳐서 보내왔다(『인조실록』 16년 2월 8일).

형태

비석 앞쪽 1/3에 해서체의 한문을 새겨 넣고, 나머지 부분에 만주문자와 몽골문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 높던 오준(吳竣)이 썼고, 전자(篆字)로 된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액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문에는 조선이 먼저 화약(和約)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병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조선군에게 청나라 태종이 스스로 항복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고 용서해 준 사실을 계속해서 기록하였다. 명나라를 도운 강홍립을 석방시킨 것과 정묘호란 때 조선 측의 요구로 화친을 허락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청나라 측의 평화 교섭 시도에 대한 인조 정권의 불손함에 다시 침공을 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청나라가 잡은 포로들을 석방한 사실과 청나라 태종의 공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비를 건립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이 비는 세워진 뒤 매몰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1895년에 고종은 치욕의 상징이라 하여 비를 한강 바닥에 매립하라고 하였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매장된 비를 다시 세웠다. 1956년에는 이승만 정부에서 국치(國恥)의 기록이라 하여 파묻었다. 그 뒤 장맛비에 드러난 비석을 원위치보다 송파 쪽으로 조금 옮겨 세웠다가, 2010년에 원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특별시사: 고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 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마부대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38, 2010.
  • 송강호, 「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의 연구」, 『만주연구』 11, 2011.
  • 이상배, 「병자호란과 삼전도비문 찬술」, 『강원사학』 19·20, 2004.
  • 이은순, 「이경석의 정치적 생애와 삼전도비문 시비」, 『한국사연구』 60, 1988.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