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三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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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 또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을 뜻하는 장상(長殤)·중상(中殤)·하상(下殤)을 통틀어 지칭.

개설

상(殤)은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사람으로, 문헌마다 나이를 규정한 내용이 다르다. 『설문해자』에는 16세에서 19세 사이에 죽은 사람을 장상, 12세에서 15세 사이에 죽은 사람을 중상, 8세에서 11세 사이에 죽은 사람을 하상이라고 하였다. 한편 『석명』「석상제(釋喪制)」에는 20세가 못 되어 죽은 사람을 ‘상’이라 하는데 상은 상(傷)과 같은 것으로 애상(哀傷)하다는 뜻이라고 되어 있다. 또 『의례』의 「상복(喪服)」 대공(大功) 주(注)에는 관례(冠禮)를 하기 전에 죽은 남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예기집설대전』에서 원나라의 진호(陳澔)는 “16세에서 19세 사이에 죽은 자가 장상이고, 12세에서 15세 사이에 죽은 자가 중상이며, 8세에서 11세 사이에 죽은 자가 하상이다. 7세 이하에 죽은 자는 무복지상(無服之殤)이라 하고, 태어난 지 3개월도 못 되어 죽은 자는 상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였다.

삼상(三殤)의 나이에 대해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예전」 오복(五服) 삼상조에는 “16세부터 19세까지를 장상이라 하고, 12세부터 15세까지를 중상이라 하고, 8세부터 11세까지를 하상이라 하며, 다 동성(同姓)이다.”라고 규정짓고 있다. 이러한 삼상의 규정은 『설문해자』, 『예기집설대전』과 동일하다.

복(服)은 성인(成人)·장(長)·중(中)·하(下)로 내려오면서 각기 1등씩 강복(降服)한다. 다만, “남자로서 이미 장가를 들었다거나 관직을 받은 자와 여자로서 시집간 자는 모두 본복(本服)을 따른다.”고 예외 규정을 두었다.

내용 및 특징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에 “삼상의 경우 우제(虞祭)를 지낼 때 신주를 세우지 않고, 이미 우제를 지냈으면 영좌(靈座)를 제거한다.”고 되어 있다. 그에 대해 1424년(세종 6)에 예조에서 왕녀(王女)의 우제는 주자의 『가례』를 따라 혼백(魂魄)으로 반혼(返魂)하며, 삼우제만 지내자고 청하자 세종이 그 견해를 받아들였다.

1473년(성종 4)에서 1474년(성종 5) 사이 예종과 장순왕후(章順王后) 소생의 인성대군(仁城大君)이 3세에 죽자 이를 둘러싸고 조선의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때 삼상에 해당하는 자는 그를 위해 사당[廟]을 세운다는 예문이 없으며, 후사를 세운다는 것도 고례(古禮)에 없으므로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드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 원칙으로 거론되었다.

삼상에 해당하는 자를 위해 사당을 세운다는 예문이 없고, 7세 이하는 삼상에도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상복을 입는다는 규정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왕세자는 예외였던 것 같다.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文孝世子)는 1786년(정조 10)에 다섯 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신주를 봉안할 사당을 세울 수 없는데 정조는 그를 위해 문희묘(文禧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5세에 요절하여 무복지상에 해당했지만 정조는 그를 위해 자최기년복(齊衰朞年服)을 입었다. 실제 상장을 치르는 가운데 문효세자가 하상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조정에서 논란조차 되지 않았다. 왕세자의 경우 더 많은 사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 이현진, 「정조대 文孝世子의 喪葬 의례와 그 특징」, 『규장각』 40, 2012.
  • 이현진, 「조선 정조대 文禧廟의 건립과정과 공간구성」, 『규장각』 42,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