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력관(三曆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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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서(曆書)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던 관상감(觀象監) 소속의 관원.

개설

삼력관(三曆官)은 시헌력(時憲曆)의 도입과 함께 역법(曆法)의 비중이 높아졌던 조선후기에 역 계산과 역서 간행을 담당했던 관상감의 핵심 관원이었다. 시헌력은 삼력관 중에서도 삼력수술관(三曆修述官)이 담당하였는데, 삼력관들은 삼력수술관을 겸임하였으며, 역일(曆日) 계산의 임무를 맡았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관상감은 조선 천문역산가들의 중심 활동 무대였다. 관상감의 소속 관원이 30여 명에 불과한 듯하나 실제 지위에 따라 부여받는 업무가 다른 여러 위계적 관원 집단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가장 상위에 위치한 삼력관은 17세기 시헌력 시행 이후 신설되었는데, 정원은 30~35명으로 관상감 천문학 부서의 중요한 사업에 차출되거나 상위 녹관직에 나아갈 자격이 주어진 특권적 관원 집단이었다.

이들 삼력관은 정해진 녹봉과 임무는 없지만 여러 사업에 차출되거나 천문학 교수직을 비롯한 녹관직에 임명되므로 대부분 녹봉을 받으며 천문관원으로서 맡은 바 일을 하게 되었고, 시험 성적이 1등일 경우 북경 사신 일행에 파견되는 부연관(赴燕官)의 특혜도 누렸다. 부연관은 관상감 관원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자리였다.

삼력관 외에도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가 오래 근무했을 경우에 부연관으로 부임하는 특전을 누렸다. 부연관들은 천문의기나 관련 서적을 구매하기 위해 특정한 해를 정하지 않고 수시로 북경에 갈 수 있어 자주 선발될 가능성이 많았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쾨글러(Ignatius Kögler)의 신법을 배우기 위해 활발한 왕래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1741년에 관상감은 해마다 연행사(燕行使))에 부연관도 함께 파견할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전례(典禮) 논쟁과 관련하여 예수회의 활동이 침체하게 되자, 1763년 관상감 영사신만(申晩)이 3년에 한 번 가도록 건의하여 이것이 잠시 항규(恒規)로 정해졌다. 그 뒤 3년에 한 번 가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했는지 1771년부터는 역법에 의문이나 질문이 있을 경우 등, 필요에 따라 파견하도록 했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삼력관은 역서 편찬을 위해 삼력청(三曆廳)에 차출되었는데, 인원만 해도 매년 24명으로 결국 삼력관 중에 임무를 맡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정도였으며, 정해진 임기가 없는 까닭에 한번 삼력관이 되면 은퇴하지 않는 이상 계속 삼력관의 지위를 유지했다.

결원이 생기면 하위 집단인 수술관들 중에서 시험을 치러 우수한 자를 발탁해 충원했는데, 수술관 이상은 음양과에 급제한 자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삼력관은 모두 잡과 출신자였던 셈이다. 이러한 삼력관은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천문역산가를 대표하는 관원이었으며 천문역산가들의 꿈이었다.

삼력관 이하 관원들은 덜 중요한 사업과 관직에 차출되거나 임무를 받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12명 정원의 수술관은 주로 일식과 월식 계산 업무에 차출되었고, 10명 정원의 추보관(推步官)은 보조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계산과 역서 편찬 사업에 매년 4명이 차출되었다.

변천

삼력관이란 직명(職名)이 실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으나, 17세기 초 무렵에 와서 관상감 천문학 부문의 실관(實官)으로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정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731년(영조 7)에 삼력청이 개설된 데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정원이 없었으나 1741년(영조 17) 30명으로 정하고, 다음 해 5명을 더하여 35명으로 하였다가 1798년(정조 22) 5명을 감하여 다시 30명이 되었다. 인원은 윤선과강지법(掄選課講之法), 즉 강독(講讀) 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1년 뒤에 다시 5원(員)이 증가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삼력관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그 중요성이 매우 커진 직책임을 알 수 있다. 삼력관은 음양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수술관·추길관(諏吉官)·수선관(修選官)이 될 수 있었던 다른 관상감의 기술직과는 달리 18세기 후반 무렵에 와서는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 자들로만 구성될 정도로 전문성이 강조되었다. 처음에는 천문생 정도로 고정적이지도 않고 전문성도 약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766년(영조 42)에 수술관, 추보관, 별선관(別選官) 외에는 삼력관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삼력관의 전문성을 대폭 강화하면서 관상감의 핵심 실관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삼력관들이 1600년 무렵에 편찬·간행된 『운관선생안(雲觀先生案)』 등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17세기 초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삼력관은 1741년에 정원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선발 규정이 까다로워졌다. 어려운 시헌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역법 계산이 종종 틀리는 경우가 발생했는데, 결국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삼력관의 선발 기준을 엄격하게 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상감의 종6품 천문학교수(天文學敎授) 및 겸교수(兼敎授)가 되기 위해서는 삼력관을 거쳐야 했다. 국가에서는 역법(曆法)이 맞지 않을 때 사행(使行) 길에 삼력관을 별도로 보내어 질정(質正)하여 알아오도록 하였다. 『음양과방목(陰陽科榜目)』에 의하면 합격자의 관력 중에서 삼력관이 가장 높은 빈도수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운과방목(雲科榜目)』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
  • 『운관방목(雲觀榜目)』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서운관지(書雲觀志)』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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