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마(薩摩)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살마 |
한글표제 | 살마 |
한자표제 | 薩摩 |
동의어 | 살주(薩州) |
관련어 | 녹아도현(鹿兒島縣), 도진의홍(島津義弘), 살마(薩麻), 살마국(薩摩國), 살마번(薩麻藩), 임진왜란(壬辰倭亂), 일향국(日向國), 정유재란(丁酉再亂)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지명 |
지역 | 일본 |
집필자 | 허지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살마(薩摩)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0년 10월 3일, 『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 |
일본의 녹아도현(鹿兒島縣) 서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서해도(西海道)의 구주(九州) 남부에 있는 녹아도현(鹿兒島縣) 서쪽 지역에 있었던 국(國)으로 서해도(西海道) 11개국 중 하나였다. 원래는 준인족(隼人族)의 거주지였다. 겸창(鎌倉)시대에 도진씨(島津氏)가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가 되었고, 강호(江戶)시대에는 하나의 번(藩)을 형성하였다. 1871년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녹아도현에 편입되었다. 살주(薩州)라고도 불렀다.
명칭 유래
살마 호칭은 『일본서기(日本書紀)』 653년 7월조에 살마(薩摩)로 처음 나오며, 『속일본기(続日本紀)』 702년 10월조에 살마국(薩摩國)이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일향국(日向國)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향국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698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당초에는 살마와 대우(大隅)를 포함한 구주의 동남부 일대를 총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8세기 초에 살마와 대우 양국이 분치되어 일향국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자연환경
살마반도(薩摩半島)와 남쪽 바다에는 천변제도(川邊諸島), 서쪽 바다에는 증도(甑島)와 장도(長島) 등이 있었다. 북쪽은 비후(肥後), 동쪽은 대우(大隅)와 일부가 일향(日向) 지역과 접하였다. 비후와 살마의 국경에는 시괄(矢筈)산을 비롯하여 국견산(國国山)·궁미산(宮尾山) 등이 연해 있고, 그 남쪽에는 자미산(紫尾山)을 중심으로 한 산봉우리들이 있었다. 또한 비후와 살마의 국경에는 살마 제일의 하천인 천내천(川内川)이 일향에서 흘러들어 와 대우의 북단을 통과하여 살마로 들어와 서쪽으로 흘러서 동지나해로 들어갔다. 그 연해부를 경계로 살마는 북과 남으로 나뉘었다.
형성 및 변천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의 하나로 녹아도현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데, 원래 준인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정의 군(郡) 설치와 호적 작성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고 702년에 살마국을 설치하였다. 겸창시대 초기에 도진씨가 살마·대우·일향 3개국의 수호에 임명된 이래 살마 지역을 본거지로 하여 수호대명(守護大名)·전국대명(戰國大名)으로 성장하였다. 1478년에 도진충창(島津忠昌)이 임제종(臨濟宗) 승려 계암현수(桂庵玄樹)를 불러 도음사(島陰寺)에서 고서를 강의하게 하고 『대학장구(大學章句)』 등을 간행하게 하여 근세 주자학의 원류가 되었다. 1542년 예수회 선교사 자비에르(Saint Francis Xavier)가 살마에 와서 일본에 가톨릭 포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도진씨는 전국시대 말기에는 살마·대우·일향을 통일하고 구주(九州) 전 지역을 제패하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587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구주 정벌 때 패배하여 살마·대우와 일향의 일부 지역이 풍신수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진가의 도진의홍(島津義弘)은 조선과도 관련이 있는 인물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네 번째 부대로 참전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선조실록』 30년 10월 3일). 이후 사천에 주둔하였으며 사천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맞서 싸워 전과를 올렸다.
1600년 도진의홍이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풍신수길을 지지하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덕천가강(德川家康) 편에 섰던 정이직정(井伊直政)의 중재로 셋째 아들 도진의구(島津家久)가 영지를 안도받고 영주로 인정받았다. 1609년 막부(幕府)의 허락을 받고 유구(琉球)에 출병하여 복속시키고 엄미반도(奄美群島)를 직접 지배하였다. 그리고 유구왕국은 그대로 유지시켜 대중국무역의 창구로 삼아 이익을 추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중국의 절강총병(浙江總兵)양종업(楊宗業)과 유격(遊擊)심유용(沈有容) 등이 왜인들의 상황을 보고하고 오해되는 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 올린 주본(奏本)에 살마국이 나오기도 하였다. 살마주(薩摩州)의 군대가 당할 자 없이 막강하여 유구국을 멸망시키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는 내용이다(『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
살마국은 태풍과 화산 분화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한 데다 토양이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재정이 궁핍하였다. 1827년 대대적인 번정개혁(藩政改革)을 단행하여 번의 채무를 정리하고, 사탕전매제를 강화하였으며, 유구무역을 확대하면서 번의 재정은 조금씩 호전되었다. 1851년11대 번주 도진제빈(島津斉彬)은 서양식 군비와 번 직영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양녀인 독희(篤姫)를 13대 장군 덕천가정(徳川家定)의 정실로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막부 말기의 웅번(雄藩)으로 대두하였다. 막부 말기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는 웅번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장주번(長州藩)과 동맹을 맺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하였다. 1871년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와 현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으로 유구를 포함하여 녹아도현이 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의 앵도(櫻島)를 제외한 녹아도시(鹿亞島市), 지숙시(指宿市), 침기시(枕崎市), 남구주시(南九州市), 남살마시(南薩摩市), 일치시(日置市), 곶목야시(串木野市), 살마천내시(薩摩川内市), 살마정(薩摩町), 아구근시(阿久根市), 출수시(出水市), 장도정(長島町), 이좌시(伊佐市) 일부, 삼도촌(三島村), 심도촌(十島村)을 포함한 지역이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会,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