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현(山淸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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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산청현(山淸縣)은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산음현(山陰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산음현으로 불렸으며, 합주(陜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감무는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현이 산청현으로 개명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산청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단성군(丹城郡)을 병합하였다. 현재도 산청군이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산청현은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산청현은 신라의 지품천현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산음현으로 개명하였으며, 강주(康州)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산음현으로 불리다가 1019년(고려 현종 9)에 합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고려말기인 1390년부터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산음현으로 유지되었으며, 1413년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산청현은 신라 경덕왕 때 강주 궐성군의 영현인 산음현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산음현에는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산음현은 합주의 속현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산음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산음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산음현에는 1390년부터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고, 조선 건국 후인 1413년에 감무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산음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의 자료인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 의하면 종6품의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인리(人吏) 42명, 인교(人校) 16명, 지인(知印) 12명, 관노(官奴) 20명, 관비(官婢) 14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13년에 산음감무가 산음현감으로 개칭된 이후 한동안 별다른 연혁의 변화는 없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에 단성현을 병합하였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단성현이 분리되었다. 1767년(영조 43)에 가까이에 있는 안음현(安陰縣)에서 일곱 살 여자아이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던 관계로, 산음과 안음의 고을 명칭을 각각 산청과 안의(安義)로 고쳤다(『영조실록』 43년 윤7월 2일) (『영조실록』 43년 윤7월 30일).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산청군으로 변동되어 진주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산청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914년에 일제가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산청군은 유지되었으며, 이웃한 단성군을 통합하였다. 현재도 산청군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산청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