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단(山川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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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국의 중요한 산과 강에 설치했던 제단(祭壇).

개설

자연물인 산과 강에 대한 한국인의 신앙은 고대국가 형성 이전부터 시작된 오래된 전통이었다. 고대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사전(祀典)을 수용하여 전국의 중요한 산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하여 제단을 설립·운영하였고, 고려시대도 비록 사전체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산천단에서 제사가 시행되었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제단과 신사(神祠)가 혼용되어 설치되어 있었으나, 유학을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설정한 조선왕조는 산천제가 민간의 무속신앙으로 운영되는 현실을 비판하여, 유교적인 제단을 설립하고 신사를 없앤 후 국가에서 제관을 파견하여 유교식으로 제사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산천단의 운영 방식은 조선 전 시기 동안 지속되지만 민간의 무속신앙을 산천단에서 완전히 배제시키지는 못하였다.

위치 및 용도

산천단은 서울 인근을 제외한 전국의 주요 산과 강에 설립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된 명산은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雉嶽山),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鷄龍山), 충청도 단양의 죽령산(竹嶺山), 경상도 울산의 우불산(于弗山), 경상도 문경의 주흘산(主吃山), 전라도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황해도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황해도 해주의 우이산(牛耳山), 경기도 적성의 감악산(紺嶽山), 강원도 회양의 의관령(義館嶺) 등 11곳이다. 주요 강[大川]은 충청도 충주의 양진명소(楊津溟所), 경기도 양주의 양진(楊津), 황해도 장연의 장산곶(長山串), 황해도 안악의 아사진(阿斯津)과 송곶(松串), 평안도 안주의 청천강(淸川江), 평안도 평안부의 구진(九津)과 익수(溺水), 강원도 회양의 덕진명소(德津溟所), 함경도 영흥부의 비류수(沸流水) 등 10곳이다.

산천단을 세운 목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홍수와 가뭄을 그치도록 비는 것을 비롯하여,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고 각종 병란(兵亂)의 발생을 막으며, 왕실 구성원의 질병을 구제[救病]하는 데에서도 효용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기우(祈雨)의 목적이었다. 가뭄은 다른 재앙보다 장기간 이어져 그 피해가 컸기 때문에 산천단의 제사는 기우제라고 불릴 만큼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산과 강에 대한 신앙은 단군신화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도 나올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지(祭祀志)」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전국의 중요한 산천을 대사와 중사, 소사로 구분하여 각각의 지역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라에서 산천만을 대상으로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한 것은 고려·조선에서 유교적인 사전에서 등급을 구분하는 방식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산천 제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산천제는 정식으로 사전에 편입되지 못하였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 길례조의 대사·중사·소사 항목에 산천은 보이지 않고,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제사들을 모아놓은 잡사(雜祀) 항목에 그 존재가 보인다. 고려시대 산천단에서의 제사가 대단히 성행했음에도 정식으로 사전에 편입되지 못한 것은 산천제가 유교적이기보다는 무속적·도교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산천제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전국의 중요한 산천과 바다는 악해독(嶽海瀆)으로, 기타 중요한 산천은 명산대천(名山大川)으로 구분되었고, 전자는 중사로, 후자는 소사에 각각 포함되었다. 이렇게 산천을 유교적인 사전에 중사 및 소사로 구분하여 편입시킨 뒤 제사의 장소를 유교적인 제단으로 바꾸고, 조정 관료 혹은 지방관의 파견을 통해 유교적인 제사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전국의 산천 제단 설립 및 제사의 운영은 문종대 편찬된 『세종실록』「오례」에 정리되어 수록되었고,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약간의 수정을 통해 등재됨으로써 조선말기까지 그 제도가 운영되었다.

형태

고려시대 산천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제단의 형태를 취했지만 이러한 제단과 별도로 신사를 설치하여 이곳에 신상(神像)을 모셔놓은 방식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후자의 방식을 부정하면서 설단(設壇)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되, 신상은 철거하고 이를 대신하여 신주(神主)를 두었다. 아울러 그 제단의 크기는 제후국의 체제에 맞추어 규모를 축소하였다.

산천단의 규모에 대해서는 1430년(세종 12)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때 단의 규모는 사방 2장 1자(약 3.3m), 높이 2자 5치(약 0.8m)의 크기였고, 제단의 사방에 3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이 있었다. 아울러 단의 바깥쪽에는 하나의 담장[一壝]이 설치되었고, 제사가 끝난 후 폐백을 묻는 구덩이인 예감(瘞坎)이 별도로 존재하였다(『세종실록』 12년 12월 8일). 이러한 형태는 세종 사후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조선 전 기간 동안 준수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예기(禮記)』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명집례(明集禮)』
  • 『홍무예제(洪武禮制)』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