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회진(山羊會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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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이산군 산양회에 설치한 진(鎭).

개설

산양회(山羊會)는 야인 지역의 파저강(婆猪江)을 마주하고 있는 강계 소속 야인 마을이었다. 태종대에 여진이 사는 작은 마을인 이언(伊彦) 몇 곳을 합하여 이주(理州)가 되었다가 이산군(理山郡)이 되었다. 세종대에 구자만호가 설치된 이후 진보(鎭堡)로서 기능하다가 고종대 혁파되었다.

위치 및 용도

산양회는 평안도 이산군(현 평안북도 초산군)에 있다. 산양회와 이산(理山)과는 90여 리(약 35㎞) 떨어져 있다. 황해도 황주의 극성(棘城)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우현령(牛峴嶺)이 나오고 우현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차유령(車踰嶺)이 나오고 차유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아호미령(阿好味嶺)이 나오고 아호미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월오내령(月吾乃嶺)이 나오고 월오내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창성(昌城) 거리령(巨里嶺)이 나오는데, 이 다섯 영(嶺)의 북쪽이 곧 이산이고, 부의 서쪽에 산양회진이 있다. 산양회는 파저강 야인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직로(直路)였다. 산양회진의 북쪽이 야인 지역의 파저강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의 방어가 긴요했다. 산양회의 동쪽으로 도을한(都乙漢), 서쪽으로 나한동(羅漢洞)에 응하는 봉화가 설치되어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강계도호부 이산군].

변천 및 현황

산양회는 여진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던 이언의 하나로 강계도(江界道) 우측에 속하였다. 1402년(태종 2) 4월 두목리(豆木里)·도을한(都乙漢)·봉획대 등과 함께 한 고을이 되어 이주라 칭했다(『태종실록』 2년 4월 25일). 그러다가 1413년(태종 13)에 이주를 이산군으로 고쳤다. 1437년(세종 19) 6월 평안도 고산리(高山里)·서해(西海)·청수(淸水) 등과 함께 산양회에 구자만호를 새로 두었다(『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구자만호는 변방 국경지대의 작은 관방인 구자를 지키던 종4품의 무관직이었다. 1458년(세조 4) 12월 근처 거주민들의 수효가 적어 산양회구자만호를 혁파하고 그 거주민들을 이산군 성내로 옮겨 들여보냈다(『세조실록』 14년 12월 13일). 연산군 당시 산양회진이라 칭해진 것으로 보아 그 후 다시 회복된 것 같다. 그 후 1883년(고종 20) 4월 청국에서 현(縣)을 두고 초소를 철수함에 따라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관서의 강변에 설치한 각 진보에서 봉화를 올릴 일이 없게 되었다. 이에 산양회를 혁파했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형태

조선 초 여진의 침공을 막는 요충지였으므로 산양회진에는 말뚝을 박아 만든 간단한 울타리인 목책(木柵)이 설치되어 있었다. 1440년(세종 22) 평안도와 함길도의 도체찰사병조 판서황보인의 연변 방어책에 따라 산양회 등의 목책을 의주의 방산(方山), 벽동(碧潼)의 벽단(碧團)과 함께 모두 강변으로 물려 설치하도록 했다. 평안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의 경작지가 강변에 있는 반면 구자는 모두 산골짜기 사이에 설치되어 있어, 적이 허술한 데를 타서 침입하면 구원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2년 7월 29일). 1492년(성종 23) 이산의 산양회성을 새로 쌓았다. 높이가 8척(약 2.4m)이고 둘레가 800척(약 242m)이었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성에는 문루(門樓)와 기둥이 있었다. 산양회는 높고 험하여 많은 수의 적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산양회보(山羊會堡)와 이산읍성(理山邑城)과 고산리보(高山里堡)는 모두 벽성(壁城)으로 쌓았다. 벽성은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결구시킨 다음, 그 내부에 흙을 채우고 다져서 성채를 구축한 형태로, 이것을 계속 잇대어 나가면 성벽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보와 성은 적에 대한 방비뿐 아니라 농민들을 괴롭히는 좀도둑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99년(연산군 5) 9월 초4일 농사철에 도적떼의 움직임을 살피던 군사인 산양회친라올(山羊會親羅兀) 1백여 명이 도적에게 잡혀갔다. 경변사(警邊使)이극균(李克均)의 군관이던 내금위 양세영(楊世英)은 산양회에서 수자리 살다가 적을 만났는데,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여 권관(權管)김언겸(金彦謙)은 항복하였으나, 양세영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연산군일기』 5년 9월 10일). 양세영의 충성스럽고 용맹함을 가상히 여겨 초상을 마친 후에 그의 아들을 서용하도록 했다(『연산군일기』 8년 1월 2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