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반승(山伴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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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산반승 |
한글표제 | 산반승 |
한자표제 | 山伴僧 |
관련어 | 부역(賦役), 승역(僧役), 잡역(雜役)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산반승(山伴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9년 4월 4일 |
조선시대에 사찰을 방문하는 왕이나 외국 사신, 관인 등을 수행하며 안내를 담당한 승려.
개설
산반승(山伴僧)은 외부인이 사찰에서 기도하거나 순례를 할 때, 동행하거나 수행하며 안내를 맡아보던 승려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그 풍습은 여전히 이어져, 왕과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과 외국 사신들이 사찰에 가서 불공을 올릴 때는 산반승이 동행하였다. 하지만 불교가 탄압을 받던 시기인 만큼 승려를 가마꾼으로 부리며 산천을 유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산반승이 가혹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 주는 내용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용 및 특징
왕이나 외국 사신, 관인 등이 사찰에 갈 때는 승려들이 대부분 동행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산반승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1503년(연산군 9)에 중국 사신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금강산에 갈 때, 예조에서 승려 학조(學祖)에게 산반승이 되어 주기를 청했지만 학조는 이를 거절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4월 4일). 학조는 세조가 매우 신임했던 승려로 왕사로 추앙될 정도의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조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름 없는 승려들은 관리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승려들은 국가나 지방 관청에서 부과하는 각종 부역뿐 아니라 중앙 관리나 지방 유력가들의 온갖 요구에도 응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특히 금강산 등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한 사찰에서는 유력가들이 유람을 올 때마다 가마를 지는 역(役)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고충이 극심하였다. 심지어는 산반승이 가마를 지고 험난한 산길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여은경, 「조선후기 사원침탈과 승계」, 『경북사학』9, 경북대학교 사학과, 1986.
- 한기선, 「조선조 세종의 억불과 신불에 대한 연구」, 『홍익사학』3, 홍익사학회, 1986.
- 한우근, 「려말선초의 불교정책」, 『서울대학교논문집』6, 서울대학교,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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