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위훈(削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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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로 책봉된 보익공신을 1577년(선조 10) 위훈으로 간주하여 삭훈한 사건.

개설

보익공신(保翼功臣)은 1545년(명종 즉위)에 발생한 을사사화의 결과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다(『명종실록』 즉위년 8월 30일). 1개월 뒤에 이 칭호를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바꾸었다. 1등은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 4명, 2등은 홍언필(洪彦弼)·윤인경(尹仁鏡) 등 9명, 3등은 송기수(宋麒壽) 등 16명을 녹공하였다. 1548년(명종 3) 황헌(黃憲)·심연원(沈連源)·김명윤(金明胤)·안세우(安世遇) 등 4명이 추록되기도 하였다.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선조 때에 이르러 위훈(僞勳)을 삭제해야 한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1577년 모두 삭훈(削勳)되었다(『선조실록』 10년 12월 8일).

역사적 배경

윤원형 등 소윤(小尹) 일파가 을사사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권신·척신이 중심이 된 권력형 비리가 자행되었다. 선조 때에 이르러 권신·척신이 몰락하고 사림이 정계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사림의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을사사화를 근간으로 위사공신이 책봉되면서 이들 공신을 중심으로 권신·척신 정치가 자행되었으나, 사림 주도의 정치가 전개되면서 이들 공신 모두 위훈으로 간주되어 삭훈되었다.

발단

1545년 경기관찰사김명윤이 계림군(桂林君)의 역모를 고변하면서 또 다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김명윤은 이 공로로 위사공신 책봉이 3년이 지난 상태에서 공신으로 추록되었다(『명종실록』 3년 8월 11일). 이 외에도 위사공신은 처음 1·2·3등에 책봉된 공신이 모두 29명이었으나 을사사화의 여파가 계속되면서 이와 같이 계속 등급 조정이 이루어졌다. 위사공신은 책봉 당시부터 친인척에 대한 허위 사실을 바탕으로 하거나, 무고 가담 인물이 포함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사림에게 비판을 받아 왔다.

경과

명종 때의 권신·척신 정치는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고 이어서 윤원형이 축출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권신·척신의 전권(專權)으로 인한 폐해 모두가 곧바로 고쳐질 수는 없었다. 유생들의 초야 공론이 더욱 활성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정계의 주도권을 사림이 명실상부하게 장악하게 되면서 하나하나 바로잡아지게 되었다. 위사공신의 ‘삭위훈’ 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참고문헌

  • 김우기, 『조선 중기 척신 정치 연구』, 집문당, 2001.
  • 한춘순, 『명종대 훈척 정치 연구』, 혜안, 2006.
  • 우인수, 「조선 명종조 위사공신의 성분과 동향」, 『대구사학』33, 198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