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녕군(朔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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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삭녕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삭녕군(朔寧郡)은 본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삭녕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철원 지방인 동주(東州)에 소속되었고, 1106년(고려 예종 1)에 승령감무(僧嶺監務)가 설치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눌 때 좌도에 소속되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고 승령을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개성부 삭녕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삭녕군은 고려 때인 1106년(고려 예종 1)에 승령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후 1403년(태종 3)에 삭녕군이 되었으며,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安峽縣)과 합쳐 안삭군(安朔郡)이 되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삭녕군으로 복구되었다. 1868년(고종 5)에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기에 군수(郡守)가 관할하였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삭녕군에는 군수(郡守)와 훈도(訓導) 각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를 보면 삭녕군에는 종4품의 군수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5명, 아전 14명이 소속되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군(郡)에는 대개 3명을 두었는데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 6방의 업무를 맡았다.

변천

삭녕군은 1403년(태종 3)에 태조비(太祖妃) 한씨(韓氏)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본향외가 고향이기 때문에 지군사로 승격시키고 승령을 소속시켰다.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을 없애고 삭녕에 소속시켜서 안삭군을 만들었다. 1416년(태종 16)에 다시 안협현을 설치하고 옛 이름인 삭녕으로 복구하였다. 1435년(세종 17)에 삭녕을 양주에 옮겨 소속시켰다. 1437년(세종 19)에 삭녕군이 신의왕후의 탄생지라 하여 향리 10호를 더 주었다(『세종실록』 19년 8월 25일). 1469년(예종 1)에 삭녕을 장단에 옮겨 소속시켰다. 1868년(고종 5)에 삭녕이 대역부도 죄인 정덕기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삭녕군수를 현감으로 강등시켰다(『고종실록』 5년 8월 6일).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개성부 삭녕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연천군에 편입시켰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삭녕군(朔寧郡)
  •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도(京畿道) 삭녕(朔寧)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