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현합(思賢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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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에서 왕이 격식을 낮추어 거처하거나, 격식을 최소화하여 신하를 만날 때 사용한 건물.

개설

사현합(思賢閤)은 경희궁의 침전인 회상전(會祥殿)과 융복전(隆福殿)의 남쪽에 위치하며 편전인 흥정당(興政堂)의 북쪽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위치적 특징은 왕의 생활공간과 신하를 만나는 공간으로 이중적인 활용이 가능하게 하였다. 왕이 편전에서 격식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여 침을 맞거나 약을 먹고 휴식해야 할 때, 신하들과의 소소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또 나라에 국상이 발생하여 왕의 거처를 격식이 낮고 규모가 작은 곳으로 옮겨야 할 때도 적절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에 현종은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병환이 깊어지자 사현합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회상전에서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빈전을 융복전에 마련하고 사현합을 왕의 여차(廬次)로 삼았다. 여차는 국상 기간에 왕이 머물며 상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거려(居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차로는 주로 침전이나 편전의 주변 행각에 온돌과 마루를 갖춘 작은 규모의 공간을 선택했다.

사현합과 유사한 공간으로 창덕궁에서는 양심합(養心閤)이 활용되었다. 양십합은 창덕궁의 정침인 대조전(大造殿) 남쪽 행각에 있으며 편전인 희정당(熙政堂)의 북쪽에 접하였다. 현종은 인선왕후의 장례를 마친 뒤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에 인선왕후의 혼전을 마련하고 양심합을 여차로 삼아 거처하였는데, 어머니의 혼전 기간을 마치지 못하고 양심합에서 승하하였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어하여 약 5년간 머물렀다. 이 시기에 영조가 몸이 불편하여 약방이 입직하여 때마다 탕약을 올리고 침 치료를 필요로 할 때 주로 사현합으로 거처를 옮겨 신료들을 만났다. 1765년(영조 41)에 세손이 병환으로 힘들어하자 영조는 세손의 거처를 사현합으로 옮기도록 하고 하루에 몇 차례씩 들러 세손의 병환을 살폈다(『영조실록』 41년 11월 29일).

변천 및 현황

사현합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1674년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영조 대에 왕이 거처하며 신하를 만나는 곳으로 활발하게 활용되었다.

1829년(순조 29) 10월에 회상전에서 화재가 일어나 융복전과 집경당(集慶堂), 흥정당 등과 함께 사현합까지 소실되었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1830년(순조 30) 10월에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복구공사를 행했으며, 1831년(순조 31)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고종대에 이르러 경희궁은 활용되지 않게 되었고, 대다수의 전각이 철거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의 공허지는 경작지로 분배되었으며, 경희궁에는 숭정전(崇政殿)·회상전·흥정당·흥화문(興化門)·황학정(黃鶴亭) 등만 남았다. 1910년(융희 4)에 흥정당이 경성중학교 교사로 활용될 때 사현합이 일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철거되어 현재는 사료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형태

사현합은 「서궐도안(西闕圖案)」과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의 「도설(圖說)」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면 5칸 규모이며, 1고주 5량 구조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박공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온돌과 마루를 갖추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 경성공립중학교, 『慶熙史林』, 경성공립중학교, 1940.
  • 박성진·우동선, 「일제강점기 경희궁 전각의 훼철과 변화」,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vol26. no1, 2006.
  • 신지혜, 「조선 숙종 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빈전, 산릉, 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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