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司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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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 만력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된 명의 관리.

개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명군의 단계적 철수가 결정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은 행인사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조선에 파견해 경략부(經略部)가 요구했던 세자들의 남부 지역 파견을 단행하도록 요구했다. 아울러 사헌에게 일본군의 정황 등을 직접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사헌의 파견으로 인해 경략부에 통제되고 있던 조선과 명의 직접적인 외교 접촉이 가능해졌다.

선조는 이 기회를 활용해 사헌에게 일본이 강화교섭에 임하고 있는 상황 등을 알렸다. 또한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이 명 조정에 일본군이 이미 본국으로 철수했다고 보고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도 설명했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주도로 평양성을 수복하게 되자, 일본과의 전쟁은 자연스럽게 명군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흐르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분조(分朝)를 해체해서 국왕 선조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동시에 한양을 수복하고자 했다. 따라서 단기간 동안 전투를 수행하고 남하했던 명군의 군량 부족 문제를 조선 측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은 명군에 대한 지원에 충실하려 했으나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과 같은 무리한 군사작전을 피하려 하였다. 선조는 명군의 한양 공격을 요구하기 위해 명군 제독이여송(李如松)과 교섭을 시도했다. 이는 조선 측과 명군 측의 전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명군이 추진하던 강화교섭만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한양을 군사력으로 되찾지 못하면 일본군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반면 경략송응창 등은 조선의 의도가 자신들이 추진하던 강화교섭을 저지하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선조와 회동을 거부했고, 명군의 전면철수를 언급하면서 조선을 압박했다. 심지어는 조선군의 일본군에 대한 전투행위까지 모두 금지했다.

송응창은 자신이 대군을 지휘하면서도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한 일에 대한 명 조정의 책임 추궁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측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본군을 일단 한양에서 철수시키려고 했다. 송응창을 중심으로 한 경략부 때문에 당시 조선과 명의 직접적인 외교 창구는 사실상 차단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명 조정은 사헌을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했다. 명은 우선 경략부에서 요청한 내용이었던 조선의 세자 광해군의 하삼도 지역 파견을 시행하도록 요구했다. 또 사헌의 파견을 통해 일본군의 철수 여부와 관련된 동향 등을 파악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경략부에 통제되고 있던 조선과 명의 직접적인 외교 접촉이 가능해졌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18일). 특히 사헌은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조선의 변경 지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선조실록』 27년 2월 21일).

하지만 사헌은 이 과정에서 명군의 지휘관을 탄핵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이는 서로의 입장이 달랐던 사헌과 송응창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사헌에 대한 조선 조정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박동량(朴東亮)은 사헌을 진실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사람이라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그는 사헌이 송응창의 부하들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대했던 것이 탄핵을 받게 된 원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7년 2월 12일).

조선 조정에서는 사헌에 대한 탄핵 여부를 파악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결국 다양한 정보를 통해 경략송응창과 제독이여송에 대한 탄핵은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헌에 대한 탄핵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선조실록』 27년 3월 28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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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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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