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북(斜下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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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길주진에 속한 만호진.

개설

사하북보는 관방시설이다. 성종대에는 경성(鏡城)의 보이(甫伊)·덕진파(德榛坡) 등의 보가 혁파되었는데, 소속 군사는 삼삼파(森森坡)에 합속(合屬)되었으며 사하북만호(斜下北萬戶)가 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북방 야인이 침입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국방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키는 군사는 적고, 주변의 진보 역시 떨어져 있어서 고립될 위기가 항상 존재했다. 숙종 초를 전후한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제승방략』에 따르면 사하북보는 남쪽으로는 덕만동보(德萬洞堡)와 2식(息) 20리(약 31.4㎞)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서북보(西北堡)와 2식 20리 거리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길주진(吉州鎭)과 거리가 1식 13리(약 17㎞) 떨어져 있었다.

김성일(金誠一)의 『북정일록』에 따르면 사하북보는 길주에서 서쪽으로 30여 리(약 12㎞) 되는 곳에 있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사하북보는 관아의 서쪽 32리(약 12.6㎞)에 있었다고 한다. 『대동지지』 단천(端川)조에 따르면, 사하북보는 단천의 서쪽 43리(약 17㎞)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사하북보는 현재 함경북도 길주군에 속해 있다.

변천 및 현황

경성의 어유간(魚游澗)·주아온(朱兒溫)과 길주의 사하북보·사말을동(斜末乙洞)과 같은 여러 보는 지키는 군사는 적고 근처에는 응원할 수 있는 곳이 멀었다. 이러한 방어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도체찰사한명회(韓明澮)는 다른 보를 추가로 설치하지 말고, 새롭게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당당하게 대비하자고 주장했다(『세조실록』 8년 9월 20일). 하지만 당시에 실제로 영북진이 설치된 것 같지는 않다.

길주의 서북쪽에 위치한 사하북구자(斜下北口子)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방비 논의는 계속되었다. 1467년(세조 13) 12월에는 함길남도절도사율원군(栗元君)이종(李徖)이 남도의 군사로 하여금 내지의 여러 구자를 나누어 방어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세조실록』 13년 12월 10일).

1469년(예종 1) 6월에는 관제가 개편되는데, 이때 길주(吉州)를 나누어 길성(吉城)과 명천(明川)을 신설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이에 길주에 속했던 사하북보와 서북보는 길성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길성과 같은 하나의 현이 두 구자를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1474년(성종 5) 10월 사헌부 대사헌이서장(李恕長) 등은 상소를 올려 이 지역에 군사를 늘리고 길성현감은 반드시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보내어서 환란을 미연에 방지할 것을 촉구했다(『성종실록』 5년 10월 28일).

1494년(성종 25) 6월에는 경성의 보이·덕진파 등의 보가 벽성(甓城)만을 쌓고 군사 수도 적기 때문에 모두 혁파되었다. 이에 소속 군사는 삼삼파에 합속시켰으며, 사하북만호가 맡도록 했다. 기존의 사하북보는 권관이 담당하게 되었다(『성종실록』 25년 6월 4일). 『제승방략』에 따르면 토병이 51명이고, 남쪽 지방에서 부방하는 군사가 50명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사하북보가 폐진(廢鎭)으로 나온다. 『여지도서』 함경도 길주 진보조에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전에 사하북보는 사라진 듯하다. 사하보가 이미 혁파되었다는 기록이 1687년(숙종 13)에 보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어느 시점에 폐진된 것으로 판단된다(『숙종실록』 13년 12월 7일).

형태

『제승방략』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024척(약 310m)이며, 여장(女墻)은 83곳이다. 곡성(曲城)은 3곳이며 옹성은 2곳인데, 남문과 북문만 있었다. 천정(泉井)도 2곳이 존재한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953척(약 289m)이다.

참고문헌

  • 『북정일록(北征日錄)』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