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현(泗川縣)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사천현(泗川縣)은 신라의 사물현(史勿縣)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주(泗州)라 하고 진주(晉州)의 소속이 되었다가,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사천현으로 개명하고, 감무는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사천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곤양군(昆陽郡)을 병합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천현은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사천현은 신라의 사물현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 사수현으로 개명하였으며, 강주(康州)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사수현으로 불리다가 1011년(고려 현종 2)에 사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사주는 진주에 속했다가 1172년에 지방관인 감무가 최초로 파견되었다. 이후 사주는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3년에 사천현으로 개명되었고, 감무도 현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직 및 역할

사천현은 신라 경덕왕 때 강주 고성군의 영현인 사수현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사수현에는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사주는 당초에 진주의 소속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사주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사주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사주에는 1172년부터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고, 조선 건국 후인 1413년에 사주의 사천현으로의 개명과 함께 감무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사천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사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의 자료인 『사천현읍지(泗川縣邑誌)』에 의하면 사천에는 6품의 무관(武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1명, 사령(使令) 15명, 관노(官奴) 11명, 관비(官婢) 12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15년(태종 15)에 사천현감은 병마사겸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로 바뀌어 그 중요도가 높아졌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이후 다시 사천현감으로 개칭되었다. 『경국대전』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천현감이 나오므로 15세기 중반에 사천현감으로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오랫동안 사천현은 연혁의 변동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사천군으로 변동되어 진주부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사천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사천군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웃한 곤양군을 통합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천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정의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사천현읍지(泗川縣邑誌)』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