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재(謝用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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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 관리로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진행했던 인물.

개설

1593년(선조 26) 조명연합군은 평양을 수복했다. 하지만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은 명군의 전투력과 조선의 군량 보급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한양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다가 크게 실패했다. 일본군 역시 평양을 잃은 후 한양에 집결했지만 이미 전체 병력의 3~4할이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가 권율(權慄)에게 대패한 이후 당분간 대규모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과 일본은 당시 난국을 타개하고 전쟁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강화협상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략송응창은 조선과 명 조정에 알리지 않고 사용재(謝用榟)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사용재는 협상 과정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던 조선의 왕자들을 무사히 돌아오도록 한 공적이 있지만 협상의 성공을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다가 외교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활동 사항

평양성 전투와 이어진 벽제관 전투를 거치며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 능력은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은 평양성 전투와 같은 대규모 교전을 회피하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고자 했기 때문에 퇴군할 때의 안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의도와는 달리 명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강화협상을 필요로 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처음 경략부가 추진했던 대일본 협상은 조선은 물론 명 조정에까지 비밀로 하면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양측의 접촉 사실에 대한 움직임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양측의 강화협상 움직임에 대한 정황을 파악한 조선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경략송응창의 입장에서는 명군의 전투력으로 일본군을 압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강화협상을 위해 송응창이 파견한 인물이 바로 책사(策士)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용재와 서일관(徐一貫) 등이었다. 이들은 송응창이 보낸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 파견한 사신으로 위장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 등과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반면 조선 조정에는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일본군을 속여 도성(都城)을 나가게 한 연후에 진격하여 섬멸하겠다고 이야기했다(『선조수정실록』 26년 4월 1일).

사용재와 서일관 일행은 소서행장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명호옥(名護屋)에 주둔하고 있는 풍신수길(豊臣秀吉)과 접견하였다(『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두 사람은 풍신수길의 강화조건을 전해 들었고, 이를 두고 회담을 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후일 사용재와 서일관 등이 황제의 인장을 위조하여 적장에게 주어 비밀리에 서로 약조하면서 강화협상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당시 양측이 합의했던 네 건의 조항은 인질 반환[納質]·통상(通商)·대동강을 경계로 한 명과 일본의 조선 분할 점유[割地]·명 황녀(皇女)를 후비로 일본에 보낼 것이었다. 사용재와 서일관이 강화협상을 맺어 공로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네 가지 약조에 관한 공문을 위조해서 일본군 측에 보냈다. 이 일은 결국 명 조정에 발각되어 이들은 모두 유배되었다고 한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하지만 사용재 등은 일본군과의 협상을 통해 포로가 되었던 조선의 왕자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선조수정실록』 26년 6월 1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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