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급외관배전의(使臣及外官拜箋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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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나가 있는 사신이나 수령(守令)·진장(鎭將) 등의 지방관이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전문(箋文)을 배송하는 의식.

개설

전문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글과, 조선에서 중국의 황후나 황태자에게 보내는 외교문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지방에 나간 사신이나 외관(外官)들이 왕과 왕비에게 전문을 올리는 의식은 크게 ‘진설(陳設)→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사배(四拜)’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의식의 세부 절차는 조선초기의 『세종실록』 「오례」부터 성종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거쳐 조선후기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시기의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는 명칭을 사신급외관배표의(使臣及外官拜表儀)로 고쳐서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表文)을 배송하는 의례로 정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사신과 외관들이 전문을 배송하는 의식은 『세종실록』 「오례」에서 처음 제정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사신 급 외관 배전의). 이후 『국조오례의』 단계에서 내용이 약간 수정됐는데, 『세종실록』 「오례」에서 향을 1번 올리던 것이 3번으로 늘어났고, 전문을 실은 용정(龍亭)과 진전관(進箋官)을 교외(郊外)로 전송하던 것에서 관문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정자인 원정(遠亭)으로 전송하는 것으로 바뀐 차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과 외관의 배전(拜箋)과 관련하여 주로 논의된 사안은 국상(國喪) 중에 배전 의식에서 복식(服飾)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474년(성종 5) 4월 예조(禮曹)에서는 대행왕비의 국상과 관련된 여러 일을 보고하는 가운데 외방의 사신이나 수령이 배전·조하(朝賀)할 때 조복(朝服)을 입게 할 것을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다(『성종실록』 5년 4월 16일). 하지만 1545년(인종 1) 윤1월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국조오례의』의 의주(儀註)와 세종 때의 예조 계목(啓目) 내용을 근거로 상기(喪期) 중에 각도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와 수령 등이 배전할 때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할 것을 주장했고, 인종이 이를 수용하였다(『인종실록』 1년 윤1월 23일).

한편 숙종대에는 서울에 올라와 있던 개성유수(開城留守)와 강화유수(江華留守)가 조정의 하례(賀禮) 의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별도의 하례 전문을 올리지 않았다가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 문제는 예조 등에서 논의한 결과 상경해 있는 지방관이 조정의 하례 의식에 반드시 참석할 필요는 없지만 하례 전문은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숙종실록』 40년 8월 1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기준으로 사신급외관배전의(使臣及外官拜箋儀)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식 당일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 패인 전패(殿牌)를 정청(正廳)의 한가운데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전안(箋案)을 전패 앞에, 향탁(香卓)을 그 남쪽에 설치한다. 의장은 뜰의 동쪽·서쪽에 진열하고 전문 운반에 사용하는 가마인 청옥용정(靑屋龍亭)은 중문(中門) 안에 설치한다. 집사자가 전문을 전안에 놓으면, 사신이나 외관들이 조복을 입고 뜰에 나와 각자의 자리에서 북향(北向)하여 선 다음 사배를 한다. 집사자가 향을 3번 올린 다음, 반수(班首)가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전안 앞에 꿇어앉으면, 집사자가 전문을 반수에게 전달한다. 반수가 전문을 받아서 진전관에게 주면 진전관이 받아서 다시 전안에 둔다. 반수가 엎드렸다가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면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엎드렸다 일어나고, 다시 여러 관원이 사배를 한다.

예를 마치면, 진전관이 전문을 받들고 나아간다. 여러 관원은 자리로 돌아와서 몸을 숙이고 있다가 진전관이 지나가면 몸을 일으킨다. 진전관이 전문을 용정 안에 안치하고 중문을 나가면 의장과 고악(鼓樂)이 앞에서 인도한다. 진전관은 용정의 뒤에서 따라가며, 여러 관원은 관문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정자인 원정까지 전송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