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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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곡사화기에 넣어 발사하던 신관(信管, [fuse])이 달린 포탄.

개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하늘에서 벼락과 우레가 내려치듯이 포탄이 날아가 적을 공격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군기시(軍器寺)화포장(火砲匠)이장손이 발명한 화약 무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박진(朴晉)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격진천뢰는 대형 화기를 이용하여 발사하는 곡사 포탄으로 제2차 폭발이 철편을 퍼트려 적을 손상케 하는 이중적 기능의 화기였다. 표면은 둥글어서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빙철(憑鐵) 등을 장전하고, 완구(碗口)를 이용하여 발사하였다.

비격진천뢰의 원형은 북송시대에 개발되었다. 당시 이름은 진천뢰(震天雷)였다. 진천뢰는 몸체가 철이면서 작은 구멍이 있고, 그 안에는 화약으로 가득 채워졌다. 진천뢰는 발사된 후 안에서 재차 점화되어 화약이 폭발하면서 철편이 터져 적을 살상하였다. 1126년(고려 인종 4) 송나라가 금나라를 공격하면서 야간에 성을 공략할 때 진천뢰를 이용하여 승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한 비격진천뢰와 기능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내용 및 특징

비격진천뢰가 처음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공략 때이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훈련도감에서 발간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 기록되어 있다. 군기시 화기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어 대완구(大碗口)로 그것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때 비격진천뢰는 400보까지 날아가서 땅에 떨어진 후 얼마 뒤 폭발했다고 하였다. 당시 명나라에도 유사한 것이 있었으나 약선(藥線), 즉 도화선을 발화 장치로 이용한 것이었다. 반면 비격진천뢰는 박달나무를 사용한 목곡(木谷)이라는 나선형의 장치를 두었다. 이 장치는 포탄 안에 도화선을 원하는 시간만큼 감안한 뒤 끝부분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발사 시 점화하는 형태였다. 또한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로 채워졌다. 나사모양으로 골을 파서 중약선(中藥線)을 감았다. 죽통과 빈 공간 사이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 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완구로 발사했다. 이런 기능 때문에 비격진천뢰는 야간에 적진을 교란시키기에 좋았고, 임진왜란 초기 경주를 수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박진이 경주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안의 왜적 진 안에 떨어뜨렸는데, 이를 본 적이 없는 왜군들이 다투어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져 즉사한 자가 많았으며, 이튿날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1만여 석을 얻게 되고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이때 사용한 비격진천뢰는 이장손이 만든 것이다.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00~600보를 날아가 떨어졌으며, 얼마 뒤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좋은 무기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이는 비격진천뢰의 폭발 시간만 피하고 폭발 전에 치우면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각 지방의 진보(鎭堡)나 관방은 방어를 위해 대포(大砲)와 불랑기(佛狼機) 외에도 진천뢰를 보관하고 있었다(『숙종실록』 7년 8월 2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서애집(西厓集)』
  • 『징비록(懲毖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융원필비(戎垣必備)』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 경인문화사, 2012.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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