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일기(北征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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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712년(숙종 38) 청(淸)나라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 사계시(査界時)에 조선 측 대표로 참여하였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1658~1715)이 지은 한문 일기다.

개설

이 책은 현재 원본은 행방을 알 수 없고, 조선사편수회편 유일본이 국사편찬위원회 도서실에 전한다. 내용은 1712년 3월 19일에서 7월 13일까지의 백두산 사계(査界) 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하여, 사생활의 언급은 자세하나 실제 사계비(査界碑: 정계비(定界碑)라고들 일컬으나, 목석비(穆石碑)라고 불러야 옳다.)를 세우는 과정에는 저자가 몸이 불편하여, 목극등과 직접 동행 등산하지 않고, 통역사이던 김지남(金指南)과 김경문(金慶門)을 대신 보내어, 목극등의 주장대로 사계비를 세웠기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 간의 국경 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사는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내용은 1712년 3월 17일부터 같은 해 7월 13일까지의 개인 일기로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조사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일기체이기 때문에 저자의 사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기는 하나, 정계비의 조사과정에 대하여는 소략한 형편이다. 임진국경사계(壬辰國境査界)에 관한 개인의 일기 중 김지남의 『북정록(北征錄)』, 김경문의 『백두산기』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북방의 국경자료로서 가치는 크다 하겠다.

박권은 1686년(숙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윤하제(尹夏濟)·조사기(趙嗣基) 등의 잘못을 소로 통박했다가 도리어 평산(平山)에 유배되었다. 1692년(숙종 18)에 풀려나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다시 서용되어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정언(正言)이 되어 장희재(張希載)를 정법(正法)대로 처리할 것과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을 공격한 유생들의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것)를 완화해 줄 것을 상소했다가, 다시 체직되었다. 곧 다시 서용되어, 부수찬·교리를 거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삼사의 여러 직을 역임하였다.

1711년(숙종 37)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한성우윤이 되었다. 이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의 접반사로 백두산에 올라가, 지형을 답사한 뒤 조·청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증거로서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이 일기는 그 때 일을 적은 것이다.

서지 사항

1책(5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8행 10자의 무계(無界), 무어미(無魚尾)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24.6×16.8cm이며,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1712년(숙종 38) 백두산 경계의 조사과정에서의 당시 접반사(接伴使)였던 박권의 일기로, 1책 55장으로 필사본이다. 원본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등사한 것이 현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1712년 3월 17일부터 7월 13일까지의 개인 일기로 저자가 백두산정계의 조사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국경사계에 관한 개인의 일기 중 김지남의 『북정록』, 김경문의 『백두산기』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북방의 국경자료로서 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백두산 기행기는 17세기 후반 청나라와 국경문제가 제기되고,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국경분쟁의 초점이 되면서, 18세기 이후에 주로 작성되었으며, 단순 유람의 목적으로 백두산을 기행하고, 기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 된 백두산 기행기는 그리 많지 않은데, 함경도의 험준한 산세와 추운 날씨로 인해 그러한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이러한 백두산 기행기의 저자들은 백두산을 신성시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산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백두산은 평생 동안 꼭 한번 오르고 싶어 하는 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백두산 기행자들은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 거쳐 가는 곳의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다. 자연경관에 대한 기록은 주로 고개·하천·산과 산맥 등에 대한 기록이었으며, 지역주민의 생활·입지·방어 등과 같은 인문경관에 대한 기록도 하였다.

셋째, 백두산 기행 목적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우리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 때문에 업무상 백두산을 기행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유람을 목적으로 백두산을 오른 경우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기행 목적에 따라 동행인·이동수단·백두산으로 가는 경로와 귀환로에서의 숙박 지점·지역 관원의 영접에 대해서, 비교한 결과 업무상 백두산을 기행한 경우의 동행인이 단순 유람의 목적으로 기행한 경우보다 많았다.

또한 기행 시 이용한 이동 수단은 두 경우 모두 말이나 가마를 이용하였고, 필요시 도보로 이동하였으므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숙박 지점에 대한 기록은 두 경우 모두 숙박한 곳의 지명 정도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업무상 기행한 경우와 단순 유람의 목적으로 기행한 경우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없었다. 지역 관원의 영접의 규모와 정도에 있어서는 업무상 기행한 경우가 단순 유람의 목적으로 기행한 경우에 비해 매우 컸다.

넷째, 기행기 속에 나타난 기행로를 고지도에 복원하고, 비교·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먼저 김지남과 박권의 경우 같은 경로로 함께 이동하였으며, 둘 다 백두산에는 오르지 못한다. 박권의 경우 7월 13일까지의 기록을 더 하고 있어 귀환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이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한사람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지명을 상대방이 기록하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박권의 귀환로는 갈 때와 동일하게 지나는 지점이 몇 곳 있지만 많은 차이가 난다. 또한 업무상 백두산을 기행한 이들의 기행로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망 체계인 육대로 중 함경도로 연결되는, 제 2대로인 경흥 제2로와 거의 일치한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조선 후기 북방의 국경자료로서 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국립중앙도서관, 『선본해제』 13,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연구소, 2011.
  • 김민정, 「18~19세기의 백두산 기행로 및 기행 양식」, 성신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 이승수, 「1658년 나선정벌 관련 기록의 서사지리」, 『고전문학연구』 제45집, 한국고전문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