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정(芙蓉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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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용정 |
한글표제 | 부용정 |
한자표제 | 芙蓉亭 |
관련어 | 규장각(奎章閣), 부용지(芙蓉池), 창덕궁(昌德宮), 택수재(澤水齋)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해경 |
장소 | 창덕궁 후원 |
규모(정면/측면/칸수) | 서측면 4칸, 남측면 5칸, 북측면 3칸 |
관련 인물 | 숙종, 정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용정(芙蓉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9년 3월 10일, 『정조실록』 19년 3월 10일 |
조선시대에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남쪽 연못가에 조성한 정(丁) 자와 아(亞) 자가 결합한 형태의 정자.
개설
부용정(芙蓉亭)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조형 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이다. 연못 가까운 곳에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 후원 초입부에 위치한 주합루(宙合樓) 일원에 위치해 있다. 부용정은 주합루의 남쪽 연못가에 면해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용정이 면한 부용지는 연꽃이 있는 연지(蓮池)이다. 부용정에는 10개의 주련(柱聯)이 걸렸는데, 그 중 8개의 시가 연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관한 내용이거나 연꽃과 연잎을 신선과 부처가 사는 신비의 공간으로 미화한 것이다. 이로 볼 때 부용지에는 연꽃이 무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는 부용지에서 신하들과 함께 꽃놀이와 낚시를 하였으며, 부용지 동쪽에 있는 영화당 앞에서는 과거시험을 시행하였다. 부용지 북쪽의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의 역할과 함께 조선후기에 학문과 예술의 번영을 불러일으킨 중심기관으로 자리하였다.
변천 및 현황
1707년(숙종 33)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정조가 고치면서 부용정으로 개명하였다. 후원의 부용지, 주합루 일원은 1776년(정조 즉위) 조성 당시 왕의 봉안각(奉安閣)과 규장각으로서의 위엄과 엄숙함을 갖추었다. 그러나 순조 이후 왕권이 쇠락하면서 규장각의 기능이 축소되고 주요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 이문원(摛文院)으로 넘어가면서 연회나 휴식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의미와 성격이 변화되어 오늘날에는 휴게, 완상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형태
부용정은 정(丁) 자와 아(亞) 자를 결합한 형태로 두 기둥을 부용지 물속에 담그고 있다. 평면의 기본형은 정면만을 다각으로 접어 5칸이 되게 한 십(十) 자형의 특수평면인데,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였다. 연못에 떠 있는 누간(樓間)을 지상건물보다 약간 높여 수상건물과 지상건물과의 조화를 추구하였고, 평면의 생긴 모양대로 쪽마루를 꺾어 내부에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부용정이 두 다리를 담근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 인사각형 연못으로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이 반영되어 네모난 연못[方池] 안에 둥근 섬[圓島]이 있는 형태로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일컬어진다.
부용정에서는 부용지의 둥근 섬을 거쳐 주합루 일대가 올려다 보이는데, 이는 부용정과 부용지 안의 원도(圓島), 어수문, 화계석단을 거쳐 주합루에 이르기까지 강한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합루 화계의 석단(石壇)에는 옥매, 단풍, 앵두나무 등이 심겼고, 어수문이 있는 층에는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생울타리 취병(翠屛)이 있었다. 따라서 화계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경관 요소로 자리하며, 부용정에서 느끼는 풍취를 한층 더해 주었을 것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가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01년(정조 19) 봄에 정조는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신하 54명과 함께 낚시를 하였다. 신하들은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정조는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정조실록』 19년 3월 10일).
정조가 부용정에서 신하들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자리가 다 마련되고 거문고 등도 다 차려놓았을 때 들보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무엇을 먹이려고 빙빙 돌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엾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 후로는 그 정자에 나올 때면 제비둥지에 대해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정조실록』 19년 3월 10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동궐도(東闕圖)」
-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한국전통조경학회, 『동양조경문화사』, 대가, 2011.
-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
- 이종호,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창덕궁(3)」,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5년 6월 1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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