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현(扶餘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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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부여현(扶餘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설립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382호, 인구가 1,337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7명, 수호군(守護軍) 29명, 선군(船軍) 228명이었다. 토지는 3,762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이 좀 넘는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부여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부여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고도(古都)로 소부리군(所扶里郡)이라 불렸으며 사비(泗泚)라고도 불렸다. 538년(백제 성왕 16)에 웅진에서 천도하여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부여군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그대로 유지하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공주(公州)의 임내로 두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처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으로 고쳤다. 부여는 백제의 수도였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충청도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는 공주로 옮기고, 부여는 가장 낮은 현으로 존속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현감으로 문과 출신이나 음서 출신자를 주로 임명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를 보면 관아에 좌수 1명, 감관 1명, 별감 1명, 군관 30명, 아전 24명, 지인 15명, 사령 25명, 관노 16명, 관비 11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부여현의 지위는 조선후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후기에는 10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10개 면 편호 3,842호, 남자 8,542명, 여자 7,998명이었다. 토지는 밭 1,072결 10부 6속, 논 1,680결 47부이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府)로 개편할 때 공주부 부여군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다. 1901년(고종 38)의 『부여군양안(扶餘郡量案)』에 의하면 민호가 3,567호, 토지는 2,366결 31부 3속이었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산군, 임천군 전 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부여군이 되어서 16개 면을 관할하였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부여군양안(扶餘郡量案)』
  • 『부여군읍지(扶餘郡邑誌)』
  • 『부여지(扶餘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