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현(扶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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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부안현은 부령현과 보안현을 합쳐서 만들어졌다. 고려 1386년(고려 우왕 12)에 부령현과 보안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14년(태종 14)에 보안을 부령에 합쳤다. 1415년(태종 15)에 또 나누었다가, 같은 해 8월에 다시 합쳐 부안현을 만들었다. 1416년(태종 16) 7월에 또 나누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다시 합쳐서 부안현으로 고쳤다. 1417년(태종 17)에 덕흥진을 폐지하여 부안진(扶安鎭)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변경하였다. 1455년(세조 1)에 부안현이 전라도 부안진(扶安鎭)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부안진이 전라도 7진에 속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부안현에 포군(砲軍) 6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부안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부령현과 보안현을 고려에 와서 고부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부령현에 감무를 두고 보안현을 겸임하였다. 1386년에 다시 나누어서 각각 감무를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14년에 보안을 부령에 합쳤다가(『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1415년에 또 나누었다가, 같은 해 8월에 다시 합쳐 부안현을 만들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21일). 1416년 7월에 또 나누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두 곳의 통폐합이 결정되었으며(『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12월에 부안현으로 고쳤다. 그에 앞서 1409년(태종 9)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그 무렵 부안현이 관할해 오던 1향 1소가 폐지되어 부안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향은 고촌(皷村)이며, 1소는 신덕(申德)이다. 1417년에 덕흥진(德興鎭)을 폐지하여 부안현으로 옮기고 부안진이라 하였으며,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첨절제사로 변경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안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부안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부안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상긴(上緊)으로 분류된 진도와 더불어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올라 있는 자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449년(세종 31)에 부안현감(扶安縣監)김윤부(金允富)가 무재(武才)에는 뛰어나 군사 방어의 적임자이지만, 글자를 알지 못하여 민정을 살피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라도관찰사가 현감의 파면을 왕에게 아뢰었다(『세종실록』 31년 6월 13일). 당시 현감을 파면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부안현감의 직임이 행정보다는 군사 측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종3품직 수군첨절제사를 4원으로 하였는데, 그 가운데 부안현에 위도첨사(蝟島僉使) 1원을 두었다.

변천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부안현을 전라도 부안진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부안도 그중 하나이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부안은 충좌위의 중부(中部)인 전주진관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전주거진이 전라중영(全羅中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중영의 속읍은 전주·김제·고부·진안·임실·금구·만경·부안 8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454명, 당보군(塘報軍) 59명, 수솔군(隨率軍) 689명으로 되어 있다.

1791년(정조 15)에 부안에 설치된 3개의 진(鎭) 가운데 검모진(黔毛鎭)과 격포진(格浦鎭)을 폐지하고 하나로 합쳐 통제할 것을 부수찬이우진(李羽晉)이 상소하였다. 백성은 마을을 떠나 그 수가 적은데도 관청은 많아서 백성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정조실록』 15년 8월 10일).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부안현에 포군 6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부안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부안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부안군지』, 부안문화원, 2015.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