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현(奉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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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기원을 두며 현재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봉화현(奉化縣)은 삼국시대의 고사마현(古斯馬縣)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옥마현(玉馬縣)으로 개칭되어 내령군(奈靈郡: 현 경상북도 영주시 중심부 일원)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봉화현이라 하고 안동부(安東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는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개칭하였다. 순흥부(順興府)가 폐지된 1457년(세조 3)~1683년(숙종 9)에 일부 영역이 봉화에 편입된 적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봉화군(奉化郡)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봉화현은 고구려의 고사마현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옥마현으로 개칭하였으며, 신라 9주(九州) 중 삭주(朔州)에 소속된 내령군(奈靈郡)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봉화현이라 하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안동부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에 전국 각 고을의 감무를 현감으로 개명하면서(『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봉화감무 역시 봉화현감으로 변경되었다.

조직 및 역할

봉화현은 신라시대에는 옥마현으로서 내령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옥마현에는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봉화현은 안동부의 속현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봉화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봉화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봉화현에는 1390년부터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고, 조선시대 1413년에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봉화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봉화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5품 혹은 6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1명, 군관(軍官) 14명, 인리(人吏) 19명, 지인(知印) 11명, 사령(使令) 16명, 관노(官奴) 15명, 관비(官婢) 14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57년에 순흥부를 폐지하면서 순흥부의 영역 중 문수산(文殊山)의 물줄기 동쪽은 봉화현에 편입하였으나(『세조실록』 3년 11월 29일), 1683년에 순흥부를 다시 설치하면서 환속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봉화군으로 바뀌어 안동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봉화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봉화군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봉화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에 위치하였으나, 1907년(순종 1)에 춘양 지역으로 옮겼다가, 1914년에 현재의 봉화읍 내성리 지역으로 다시 옮겼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