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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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고종 20) 조선과 청국 사이에 체결된 압록강 양안의 의주와 만주 봉천 사이의 무역에 관한 규정.

개설

1883(고종 20) 12월 1일 청국에서 2통의 외교 자문(咨文)을 보냈다. 그중 하나는 조선 변방 백성들과 만주 봉천의 무역 장정을 토의한 대로 하라는 교지를 받은 일에 대한 북경예부(北京禮部)의 자문이었고, 또 하나는 중강(中江)의 교역 장정 책자를 지조(知照)하는 일에 대한 성경예부의 자문이었다. 조선에서는 자문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각각 회신하는 자문을 지어 파발을 띄워 의주부로 보내 들여보내게 하였다. 이틀 후인 12월 3일 양국 간에 ‘봉천과 조선 변민 교역 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이 체결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청국이 조선과 무역 장정을 체결한 데에는 서양 열강과 일본에게 조선이 청국의 속국(屬國)이라는 점을 명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조약의 기본 성격이 청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조선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예컨대 조약문 3조의 “압록강 이내와 평안도 인근 각처 하구(河口)가 청국에서 제물(祭物)과 관용(官用) 물고기를 잡는 곳이므로 조선인이 잡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에서도 양국의 불평등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형식적으로나마 조선과 청국 간에 초보적인 외교 절차를 거쳐 조약을 체결한 점은 개항기 변화하던 양국의 외교 관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내용

봉천과 조선 변민 교역 장정은 24개조로 구성되었다. 주 내용으로는, 제1조에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중국이 속국을 우대하고 오로지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개설한 것으로서, 각 항구에서 통상(通商)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므로 수시로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은 봉천성(奉天省)과 조선 변경의 상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기타 각국은 이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이 교역 장정이 조선과 청국에만 국한되며, 종번(宗藩) 관계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표방하였다. 특히 제8조에 “조선에서 북경에 들여가는 공물(貢物)은 국가 의전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모든 절차를 규례에 따라야 한다. 공물은 으레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제14조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므로 본토와 같이 본다.”라고 하여 청국의 속방임을 나타내었다. 이 점은 제23조에 “지방 관리가 교섭할 일이 있어 문건을 교환하는 경우에 격식을 지켜야 한다. 조선은 반드시 ‘천조(天朝)’ 혹은 ‘상국(上國)’이라는 글자로 존대해서 써야 한다. 일반적인 공문도 규례에 따라야 하고, ‘중동(中東)’ 등의 글자를 써 일정한 규례를 어기지 못한다. 봉천성의 변방 관리들은, ‘조선국(朝鮮國)’ 혹은 ‘귀국(貴國)’이라는 글자를 써 우대하는 뜻을 보인다.”라고 하여 행정적 절차상에서도 양국 간의 관계를 드러내도록 하였다.

변천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국 세력이 조선에서 제거되자 교역 장정은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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