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시공인(奉常寺貢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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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 이후 종묘·제향에 쓰이는 제수품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조달해 바치던 봉상시 소속 공인.

개설

고려시대에 제례를 주관하고 왕의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를 제정하는 일을 맡아 보던 태상시(太常寺)를 충선왕대에 봉상시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1409년(태종 9) 국가의 제사를 치를 때마다 전담하는 관원이 없이 겸임으로 운영되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전농시(典農寺)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치고 예조에 소속시켜 제수(祭需) 물품을 관리하게 하였다. 또 봉상시도 전농시에 흡수·통합시키면서 적전(籍田)을 경작하여 제수 비용을 마련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9년 12월 17일). 그러다가 1420년(세종 2)에 봉상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는데(『세종실록』 2년 윤1월 10일), 이후 봉상시는 조선말기까지 존속되었다.

봉상시공인(奉常寺貢人)은 대동법 시행 이후 봉상시에 속하여 본시에서 거행하는 각종 제수품을 조달해 바치던 청부상인을 일컬었다.

담당 직무

봉상시는 왕의 시호·묘호를 정하고, 국가 제례에 관한 각종 물품을 마련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 태조 이성계는 봉상시에 명하여 선조 사대(四代)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여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9일). 1409년(태종 9)에는 봉상시를 전농시로 이름을 바꾸고 동서적전(東西籍田)에서 나는 수확물과 지방 고을에 분정(分定)한 공물을 바탕으로 국가의 주요 제사에 제수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봉상시에서 제수품을 마련하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봉상시 소속 공인들에게 공물가를 지급하여 제수품을 시중에서 구입하여 조달하게 하였다. 물론 대동법을 시행하기 이전에도 공물아문에 물품을 대신 조달하고 고액의 값을 받는 사주인(私主人)들이 있었으나,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시행하면서 방납(防納)에 참여하는 사주인을 대신하여 각사에 속해 정식으로 공물가를 지급받는 공물주인층이 늘어났다. 봉상시공인 역시 이에 속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1807년 당시 봉상시에서 공인들에게 지급하는 공물가(貢物價)는 대략 11,522석 9두 정도였다. 봉상시공인은 이를 바탕으로 유청·오미자·건포도·황률·곶감·개암·잣·참기름·메밀·중포·생사슴·생토끼 등의 물품을 조달해 바쳤다.

변천

봉상시공인은 갑오개혁기 호조로 재정기구가 단일화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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