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왕(福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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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의 제1대 황제.

개설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의 지방정권으로 존속한 남명의 제1대 황제였다. 홍광제(弘光帝)라고도 불리었다.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나 소극적이고 유약해, 쾌락에 빠져 지냈으므로 국력 회복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였다.

활동 사항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崇禎帝)가 북경 매산에서 자살하면서 명조가 멸망한 뒤 양자강 이남에 남명(南明)정권이라 불리는 명 왕실의 유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정권을 건립한 이가 복왕(福王)주상순(朱常洵)의 아들 주유숭(朱由崧)이었다.

복왕은 1617년에 덕창왕(德昌王)에 봉해지고 1643년 7월 복왕을 습봉(襲封)하였다. 1644년 3월 북경이 함락되자, 노왕(潞王)주상방(周常淓)과 함께 회안(淮安)으로 도망갔다가 봉양총독(鳳陽總督)마사영(馬士英) 등에 의하여 남경(南京)으로 맞아들여졌다. 복왕은 그해 5월에 감국(監國)이 되었다가 제위에 올랐는데, 홍광(弘光)으로 개원하였다. 연호로 인하여 홍광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른바 남명정권이었다.

복왕은 성격이 흐릿하고 유약하였으며, 주색에 빠져 지냈는데, 그 때문에 제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가 제위에 오르기 전 장신언(張愼言)과 여대기(呂大器) 등은 그가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술에 빠져 지내고 불효할 뿐 아니라 아랫사람을 혹독하게 대하며, 독서를 하지 않고 관리가 하는 일에 참견한다는 7가지 이유를 들어 그 대신 노왕주상방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사영과 그의 당여인 완대성(阮大鋮) 등에 의하여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마사영과 완대성을 총애하고 정치를 맡겼다. 하지만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사적인 감정으로 정치를 행한 탓에 국가의 안정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645년 5월에 청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남경으로 접근을 하자 복왕은 무호(蕪湖)로 달아났으나,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조선에서는 1645년 1월에 복왕이 정권을 세운 소식은 알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였다(『인조실록』 23년 1월 16일), 이해 3월 기록에는 복왕주상순이 이자성(李自成)에게 시해되고, 그의 아들인 주유숭이 남경에서 즉위하였으나 음탕하고 어지러운 짓거리를 행하여 법도가 없어서 중원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3년 3월 17일).

참고문헌

  • 『명사(明史)』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