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보(保和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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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회령도호부에 설치한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보화보가 속해 있던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는 조선초기 여진족이 점령하였을 때 알목하(斡木河), 혹은 오음회(吾音會)라고 불리던 곳이다. 1433년(세종 15) 우디거족이 알목하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建州左衛都督)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여진족의 내분을 기회 삼아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등 지역에 진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회령도호부에는 석성이 둘레 8,138척(약 2,466.1m) 규모로 축조되었고, 네 곳의 참(站)이 설치되었다. 또한 외적이 공격하면 바로 알릴 수 있도록 북면에 하을개(下乙介)·고령북봉(高嶺北峯)·고령전봉(高嶺前峯)·오릉초(吾弄草)·오산(鰲山)·부동우(府東隅)·영안(永安)·염통(念通)·전괘(錢掛) 등 9곳, 서면(西面)에 보화(保和)·보을하(甫乙下)·독산(禿山)·관문(關門) 등 4곳, 도합 13곳에 봉수대를 운영하였다. 보화보는 바로 서면의 보화 봉수대에 설치된 군사시설이다.

위치 및 용도

회령도호부 중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압록강 변에 위치하였다. 보화보 동쪽으로는 보을하와 독산(禿山), 관문(關門) 등이 이어져 있었다. 보화보와 같은 진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보화보는 국경지대에 설치한 작은 규모의 군사시설이었던 만큼 실제 방어적인 기능보다는 적의 동향을 감시하고, 적이 침입했을 때 빠르게 후방에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봉수대로서 처음 사료에 등장한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회령도호부]. 그리고 1454년(단종 2) 함길도관찰사 성봉조(成奉祖)와 도체찰사김문기(金文起)에게 회령의 보화보를 혁파하는 것이 좋을지, 옮기는 것이 좋을지를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기사로 볼 때 세종대에서 문종대 사이에 보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단종실록』 2년 3월 10일). 관찰사와 도체찰사가 보화보를 태지휘(太指揮)의 집 앞으로 옮겨 설치하고 천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수호하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이전되었으나,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단종실록』 2년 10월 29일).

참고문헌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