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報恩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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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군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보은군(報恩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현이다. 조선 1416년(태종 16)에 보은현으로 삼고 현감을 파견하였다. 15세기에 가호가 327호, 인구가 1,457명이었다. 인구에 비해서 토지가 넓어서 5,229결이나 되었고, 이 가운데 논이 1/3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64명, 수성군(守城軍) 1명, 선군(船軍) 136명이 있었다. 1810년(순조 10)에 보은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 회인군을 병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보은은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군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삼년군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다시 보령군(保齡郡, 保令郡)으로 바뀌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개창 후인 1416년(태종 16)에 보령현(保寧縣)과 발음이 같다고 해서 보은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파견하였다. 속현으로 임언부곡(林偃部曲)이 있었다.

군의 중앙에 유명한 삼년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가 소백산맥의 방어선을 지키는 데 최고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삼년산성의 군사적 비중은 줄었지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보은에는 유명한 속리산의 속리사, 즉 법주사가 있었다. 속리사가 대찰이고 왕실과 관련이 깊어서 간간이 군의 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92년(고종 29)부터 동학교도들이 교조신원과 동학의 인정, 일본과 서구세력의 추방을 주장하는 탄원집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가장 중요한 집회가 12월과 다음 해 3월에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보은 집회였다(『고종실록』 30년 3월 30일). 이 집회가 1894년(고종 31)에 동학농민전쟁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파견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20명, 아전 30명, 지인 25명, 사령 22명 관노 10명, 관비 9명이 있었다.

변천

1810년(순조 10)에 태실을 설치했다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시켰다(『순조실록』 10년 5월 25일).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보은군은 10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가호는 4,547호, 인구는 남녀 합쳐 14,492명이었다. 토지는 밭 3,794결, 논 1,101결이었다. 1914년에 회인군의 일부를 병합해서 10개 면으로 확충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보은군지(報恩郡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