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산진(保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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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평양부에 설치하여 별장이 관할하던 군사시설.

개설

평양부(平壤府)는 조선에서 한양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면서 평안도 방어체제의 핵심적인 거점이었다. 대규모 적이 압록강 방어선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로변에 있는 산성이 일차적인 방어를 하고,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마지막으로 평양성에서 방어를 하는 것이 평안도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보산진은 평양 서남쪽 대동강(大同江) 위에 설치되어 서해를 통해 올라오는 적을 감시하고, 교통로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평양부 서남쪽의 대동강이로도(伊老島) 위에 설치되었다. 이로도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섬으로서 서해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올라가려면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중화(中和)나 황주(黃州)에서 강 건너 강서(江西)나 용강(龍岡)을 가기 위해 지나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로도는 교통과 곡물 운송, 정보 교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섬이었다. 따라서 보산진의 역할도 외적의 방어와 함께 교통·정보·운송·감시 등 다양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순(巡)·병영(兵營)―주진관(主鎭管)·독진(獨鎭)―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여기에 지휘체계가 미치기 어렵거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에는 추가적으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였다. 또한 평안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독진이 많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적의 침입 경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압록강 변을 모두 독립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평양부의 경우 순찰사가 지휘하는 순영(巡營)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특별했다. 순영에는 장십부(壯十部)가 운영되어 대규모 병력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평양은 대규모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성을 활용한 전투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평양성 밖의 대동강 위에 있던 보산진은 방어적 기능보다는 정보나 운송 등으로 평양을 배후 지원하는 역할이 더 강조되었다.

변천 및 현황

『경국대전』 진관체제에서는 볼 수 없는 진보이다. 보산진은 『조선왕조실록』에 1722년(경종 2) 처음 등장한다. 평안감사권업(權𢢜)은 도내 방어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화에 평양·삼등(三登)·상원(祥原)·강동(江東)·보산진 등을 관할하게 하여 후영(後營)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경종실록』 2년 3월 13일). 그러나 실제 18세기 『속대전』의 진관체제에서 보산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여지도서』에는 보산진이 평양에 소속되어 별장의 책임 아래 377명의 군졸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산진은 19세기 후반 고종대까지도 평양부의 주요 진보로서 유지되었다.

형태

둘레 910척(약 276m)의 석성이 있었다. 별장이 관할하는 진으로서 군병 377명이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