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해보(別害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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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남도 삼수군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별해보는 평안도 강계와 삼수 사이에 위치한 관방시설로 연산군대에 처음 성을 축조하였다. 이후에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선조대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하여 별해진이 되었다. 현종대에 함흥(咸興)과 삼수 사이에 설치한 장진보책(長津堡柵)을 별해진에 소속시켰다. 정조 연간에는 장진보책을 분리하여 장진진(長津鎭)으로 올렸고,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한 뒤 그 치소(治所)를 별해진으로 옮겼다. 이로써 별해진은 장진도호부가 되었는데, 장진도호부는 헌종 연간에 다시 병마첨절제사진으로 조정되었다.

위치 및 용도

별해보는 조선시대에는 삼수군(三水郡)에 속해 있었으나, 정조 연간에 장진부(長津府)가 이설되어 변화를 맞이했다. 현재는 함경남도 장진군에 해당하며 풍산군, 삼수군, 함주군, 영원군, 후창군, 강계군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삼수군은 세종 연간에 설치된 사군(四郡)이 폐지된 이후, 여진족과 경계를 하는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강계와 동쪽으로는 함흥과 각각 4백여 리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산과 하천이 많아 지형이 험한 이유로 별도의 방어책은 마련되지 않았으나, 선조대 이후 삼수와 갑산 지역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위협이 미치게 되면서 진(鎭)으로 승격되는 등 중시되었다. 이후 후금(後金)이 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함흥으로 향하는 직로(直路)로서 중시되었으며, 황초령(黃草嶺)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변천 및 현황

별해보는 삼수군의 진보(鎭堡)이다. 본래 삼수군은 갑산군(甲山郡)의 삼수보(三水堡)였다. 1441년(세종 23)에야 만호를 두고 적의 길목을 막았고, 1446년(세종 28)에는 군(郡)으로 분리되어 승격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일시적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곧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별해보는 본래 ‘별을하(別乙下)’라는 명칭의 지명이었는데, 1446년(세종 28)에 삼수보를 군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편입되었다(『세종실록』 28년 4월 11일). 그러나 이 시기에는 삼수군을 승격하는 과정에서 별을하 등 인근 지역을 소속시킨 것으로 별도의 관방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별해보는 연산군대에 설치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윤7월, 좌의정성준(成俊)과 우의정이극균(李克均)은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 및 『서북지도(西北地圖)』 등을 찬술하여 올리면서 백두산 좌·우측의 요충지에 대해서 자세히 진달하였다. 이들은 삼수군의 별해와 신방구비(神方仇非)가 요충지이므로 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두 곳의 공역을 한 번에 시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함흥 이남의 백성을 동원하여 별해보를 우선 축조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윤7월 8일). 『여지도서』에 따르면 이때 별해보를 축조한 뒤 병마권관(兵馬權管)을 두었다고 한다.

별해보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별해보 권관에게는 다른 보의 권관보다 두 명이 많은 총 네 명의 군관을 두기도 했다(『중종실록』 1년 12월 13일). 별해보의 군관은 곧 두 명을 감축하였지만 1520년(중종 15)에는 별해보에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중종실록』 15년 9월 15일). 이는 별해보가 인근의 진보와 거리가 상당히 멀어 지원을 받기 어려운 반면, 내지로 향하는 적의 길목에 해당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폐사군(廢四郡) 지역에는 여진인들이 넘어와 살면서 약탈을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들이 삼수 지역으로 나올 경우, 별해보와 함흥 사이의 너른 공간에는 특별한 방어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방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1524년(중종 19) 병조에서는 함경도남병사최한홍(崔漢洪)이 계본을 올려 별해보가 함흥에서 11식정(약 129.6㎞)이나 떨어져 있어 그 사이에 하나의 현(縣)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중종실록』 19년 11월 26일). 중종은 이에 대한 논의를 지시하였고, 의정부와 비변사의 대신들은 함경도에 사람이 적고 아전·관노비를 두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연(閭延)·무창(茂昌)에서 별해보를 거쳐 함흥에 이르는 길이 매우 가깝다’면서 그 필요성은 인정하여 대안으로 토병을 보내 거주케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중종실록』 19년 12월 9일). 결국 별해보와 함흥 사이에 하나의 고을을 두는 논의는 정지되었다. 대체로 별해보가 있는 삼수나 갑산 일대는 지형이 매우 험하여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려웠으므로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별해보는 선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중시되기 시작했다. 1595년(선조 28) 8월 이후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문제로 건주여진과의 군사적 마찰이 발생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남도 삼수·갑산 일대의 방비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의주에서 창성에 이르는 압록강 하류 지역에 대한 방비 논의가 나타났으나, 명군이 왕래하는 길목이었던 만큼 압록강 상류 지역과 장백산 서쪽 폐사군 지역을 통한 적의 침입 가능성이 고조되었다. 이 시기에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도체찰사였던 유성룡(柳成龍)은 별해보 방면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고 함경도남병사(咸鏡道南兵使)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1596년(선조 29)에는 별해보의 만호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시킴으로써 진을 두었다. 대체로 이 시기에 별해보를 첨절제사진으로 승격하거나 중시했던 것은 함경남도로 돌입하는 여진족으로부터 감영인 함흥을 지켜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별해진과 함흥 사이에 별도의 고을이 있지 않았고, 또 길목을 차단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여진족의 침입 위협이 계속되었고, 별해를 통한 내지 침입도 우려되었으므로 함흥의 성을 개축하자는 논의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선조실록』 36년 6월 10일)(『선조실록』 39년 11월 2일). 또 1607년(선조 40) 9월에는 누르하치[奴兒哈赤]의 군사 활동에 대한 방비책이 강조되는 데 반해 별해진의 길목을 지킬 방법이 없어 정평부사(定平府使)윤홍(尹鴻)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선조실록』 40년 9월 3일). 이러한 상황은 광해군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8월, 비변사에서는 함경도관찰사장만의 차자(箚子)에 대하여 논하면서 누르하치가 폐사군 지역으로부터 돌입하여 별해로 진출할 경우 함흥을 지켜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기도 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6일). 이는 별해보를 진으로 승격시켰음에도 함흥과의 사이에 공백이 많아 방비책을 튼튼하게 마련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별해진과 함흥 사이의 공백에 대한 문제는 현종 연간 장진보책(長津堡柵)의 설치로 일단락을 보았다. 본래 함경도 감영에서는 장진강(長津江)에 별장(別將)을 두고 사졸을 모집하도록 하여 설한령(薛罕嶺) 서쪽과 별해령(別害嶺) 북쪽에서 발생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1665년(현종 6) 함경도관찰사민정중(閔鼎重)은 장진별장을 폐지하고 군졸들로부터 포(布)를 받고 있는 점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에 따라 장진강에는 도로 별장을 두고 장진보를 설치하였다(『현종실록』 6년 6월 22일). 장진보책은 별해진과 함흥 사이의 장진강에 위치하였는데, 얼마간 그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이르러 장진보에 수령이 업무를 보는 공간인 읍치(邑治)를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는 일이 논의되었다. 이때의 논의는 장진보를 진으로 승격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이때 별해진은 지형과 거리를 고려할 때 삼수군이 아닌 장진진에 속하게 하려는 논의마저 나타났으나, 이 경우 삼수군을 보전할 수 없고 경솔히 읍치를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지되었다. 이로 인해 장진보는 장진진으로 승격하고 별장을 첨사로 올리는 데 그쳤다(『정조실록』 9년 7월 14일)(『정조실록』 9년 7월 14일). 이로써 장진진은 황초령을 사이에 두고 별해진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정조실록』 9년 12월 6일). 장진진에 대한 읍치의 설치는 1787년(정조 11) 7월, 함경도관찰사정민시(鄭民始)의 의견에 따라 다시 논의되었고, 8월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정조실록』 11년 7월 4일)(『정조실록』 11년 8월 3일). 이때 장진부에는 방어영이 설치되어 황초령의 방어를 전담하게 되었다. 1796년(정조 20) 5월에는 함경도어면진(魚面鎭) 파수장(把守將)이건수(李健秀)가 상소를 올려 별해진은 삼수에 속하지만 부의 읍치[府治]와의 거리가 4백 리에 달하고 산과 강으로 막혀 있어 민폐가 극심하다면서 1백여 리 이격된 장진부로 이속할 것을 요청했다(『정조실록』 20년 5월 8일)(『정조실록』 20년 11월 19일). 그러나 이때의 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별해진은 이전과 같이 장진부가 아닌 삼수부에 속하게 되었다.

1813년(순조 13) 함경도관찰사김이양(金履陽)의 장계에 따라 자작(自作)·어면(魚面)·강구(江口)·신방(神方)·묘파(廟坡) 등 삼수부의 다섯 개 진보의 혁파를 청하였다. 그러나 별해진을 홀로 남겨둘 경우 보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장진의 부치를 별해진으로 옮기거나 독립된 진영[獨鎭]을 설치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영의정김재찬(金載瓚)은 이에 대해 장진부를 별해진으로 옮기는 것은 추후에 논의하고 대신 독진을 설치하는 것을 건의하였다(『순조실록』 13년 4월 5일). 비변사에서는 김재찬의 논의에 찬동하면서 별해진을 독진으로 삼아 장진부와 서로 의지하는 동시에 삼수부의 폐단을 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순조실록』 13년 4월 26일).

별해진은 1814년(순조 14) 12월 독진이 되었다(『순조실록』 14년 12월 28일). 그러나 이는 장진부를 옮기자는 논의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임시로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1815년(순조 15) 5월 함경감사이희갑(李羲甲)의 요청에 따라 장진부를 별해진으로 옮기는 논의가 재개되었다. 영의정 김재찬이 장진은 척박하지만 별해는 요지로서 인물(人物)이 모이는 지점이므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결정을 보게 되었다(『순조실록』 15년 5월 5일). 장진부가 이설되면서 별해진은 이때 이르러 혁파되었다.

장진부는 1843년(헌종 9) 다시 장진진으로 내려가 부사는 첨사가 되었다. 이는 장진에 도호부를 설치한 이래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徭役)이 증가하면서 백성들이 흩어졌기 때문이다(『헌종실록』 9년 8월 2일). 장진진은 1859년(철종 10) 5월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하고 첨사는 부사로 올렸다(『철종실록』 10년 5월 19일). 그리고 1895년(고종 32) 5월에는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라 장진부는 장진군(長津郡)이 되어 강계부(江界府)에 속하게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로써 별해진은 삼수에서 장진으로 다시 강계에 속하는 행정 구역상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형태

별해보는 삼수군에서 서쪽으로 370리(약 145.3㎞)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강계부와의 접경 지역에 위치했다. 별해진은 극변에 해당하는 삼수군에서도 벽지(僻地)에 해당했다. 이 지역은 폐사군 지역과도 인접하여 여진족과 요충지에 있었다. 지형의 문제로 보(堡)의 설치는 1501년(연산군 7)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이때 별해보는 돌로 축조되었고 둘레는 1,300자(약 394m), 높이는 9자(약 2.7m)였다. 『만기요람』에는 그 둘레를 1,321자(약 400m)로 명시하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둘레 393m, 높이는 2.7m라는 실측 결과와 근사하다. 별해진 안에는 별해창(別害倉)이라는 창고가 있어 곡식을 보관하였고, 또 노탄봉봉수(蘆灘峯烽燧)가 있어 삼수부와 교통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