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진(白峙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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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성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백치진은 숙종 초에 도성 주변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축조되었고, 병마첨사(兵馬僉使)가 임명되었다. 영조대 중반까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개성부(開城府)로 옮기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후 정조대에 개성부로 이속되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황해북도 장풍군 장좌리에 있다. 백치는 금천(金川)과 토산(兔山)의 사잇길에 위치한 고개로 이곳을 지나 내려가면 곧바로 임진강과 통하는 개성부 동북 지역의 요해지이다. 조선후기에 개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73년(현종 14)에 청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도성 주변의 방어 체계를 전반적으로 정비하였다. 조선은 그 과정에서 개성 지역에 대흥산성(大興山城) 등을 쌓았다. 또한, 1676년(숙종 2) 4월에 백치에 성을 축조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방어의 책임자로 첨사(僉使)를 임명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년 4월 13일). 백치에 최초로 첨사가 임명된 것은 1678년 8월로 보인다. 즉, 이때 소모별장(召募別將)을 승직시켜 백치의 병마첨사로 삼고 종전대로 황해병사(黃海兵使)에 소속시킨 것이다(『숙종실록』 4년 8월 10일).

그러나 개성 일대의 방어 중점이 청석동(靑石洞) 일대로 변화하면서 영조 전반기에 백치진의 방어 체계가 약화되었다(『영조실록』 8년 12월 8일). 백치진은 개성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금천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조정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백치진의 관할권을 개성부에 이속시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영조실록』 13년 1월 10일). 그러나 소속 토지와 민졸(民卒) 등이 황해도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일단 개성부 이속은 유보되었다.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1756년(영조 32) 1월에도 금천군 소속으로 바뀐 백치진을 다시 개성부 책임 아래 두자는 의견이 제시되지만, 황해도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조 중기에 백치진은 개성부에 이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천의 대남면, 소남면, 백치진, 장단부의 사천면을 환속시켰다(『정조실록』 20년 5월 29일). 이를 계기로 개성부 일대의 방어 책임은 개성부로 확실히 귀속되어 일원적인 방어체제가 가능해졌다.

형태

백치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581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 500m의 긴 타원형 성이며 성벽은 돌로 외면을 축조하였다. 성벽에는 치(雉) 4개를 비롯한 성곽시설이 있다. 현재 일부 성벽과 성터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
  • 『해서읍지(海西邑誌)』
  • 『대동지지(大東地誌)』
  • 『동여도(東輿圖)』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노영구, 「조선후기 開城府 일대 關防體制의 정비와 財政의 추이」,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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