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안파두(伯顔波豆)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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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백안파두 |
한글표제 | 백안파두 |
한자표제 | 伯顔波豆 |
상위어 | 역학(譯學), 몽학(蒙學) |
관련어 |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첩해몽어(捷解蒙語)』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문헌 |
집필자 | 정광 |
저편자 | 미상 |
간행처 | |
간행년일 | 미상 |
권책수 | 미상 |
사용활자 | 미상 |
표제 | 伯顔波豆 |
소장처 | 원전은 전하지 않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백안파두(伯顔波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3월 18일 |
조선전기에 사역원의 몽학에서 사용한 몽골어 교재.
개설
1430년(세종 12) 상정소(詳定所)의 계문(啓文)과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 역과몽학(譯科蒙學)조에 등장하는 서목으로 조선전기의 사역원에서 사용하던 몽골어 학습서였다. 원전은 전하지 않는다.
편찬/발간 경위
몽골인들이 아동 교육용으로 사용하던 훈몽서(訓蒙書)를 고려후기의 사역원이나 그의 전신인 통문관(通文館)에서 수입하여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사역원에서도 이를 계속해서 몽골어 학습 교재로 삼았다. 1430년(세종 12) 상정소에서 제학의 취재에 시험할 경서(經書)와 기예(技藝)의 수목을 정한 기사(『세종실록』 12년 3월 18일)에 보이며, 『경국대전』 「예전」 역과몽학 조에도 보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에도 교재로 사용되었으나 1737년(청나라 고종 2)에 다른 몽학서와 함께 폐지되고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첩해몽어(捷解蒙語)』 등 사역원에서 자체적으로 편찬한 학습서로 교재가 바뀌었다.
서지 사항
원전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구성/내용
『백안파두(伯顔波豆)』는 몽골어 ‘Bayan Paatur’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었다. ‘백안(伯顔)’은 몽골어의 ‘Bayan’이며 ‘부자·귀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몽골 팔인무(八鄰武) 사람으로 원(元)나라 세조(世祖)대에 유명한 장군이자 재상이었던 ‘바얀 메르기트([伯顔蔑兒吉解], Bayan of the Merkid)’를 말하였다. ‘파두(波豆)’는 몽골어 ‘Paatur’의 한자 전사로 이 말은 중세 몽골어에서 ‘영웅·용사’를 뜻하였다. 따라서 ‘영웅 바얀’이라는 뜻이었다. 원 세조쿠빌라이 칸을 도와 송(宋)나라를 정복하고 성종(成宗) 때에 승상(丞相)을 지낸 바얀 장군을 칭송하여 훈몽(訓蒙) 교재로 한 것이었다. 몽골의 영웅 이야기를 소재로 한 교재로 아동들의 용감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북돋워 주는 내용이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한 교재는 몽골족을 비롯한 북방민족들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많았다.
참고문헌
- 정광, 『역학서 연구』, J&C, 2002.
- 정광, 『조선시대의 외국어교육』, 김영사, 2014.
- 한우근 외, 『역주 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