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천(防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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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 연변에 쌓은 둑으로, 하천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수리시설.

개설

방천(防川)은 하천물이 자연제방을 넘쳐흘러 논밭을 침수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연제방 위에 덧대어 쌓은 둑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천을 가로막아 수위를 높여 하천물을 관개용수로 활용하는 천방(川防), 즉 보(洑)를 사료상으로는 방천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작은 하천의 물을 옆으로 빼돌려 도랑을 통해 농지에 물을 대는 관개시설로 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방천은 기본적으로 하천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기 위한 수리시설이었다. 그런데 하천 연변의 저습지를 개간하여 농지로 삼는 작업을 수행할 경우 방천은 농지를 보호하는 제방 노릇도 겸하게 되었다. 즉 농지보호시설이기도 하였다. 방천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한번 무너지게 되면 다시 쌓는 일도 고된 일이었다.

변천 및 현황

방천은 읍성을 축조할 때 함께 만드는 해자(垓字)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축조되었다. 그리고 방천을 위해 쌓은 둑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방천은 돌로 쌓고 돌 틈 사이사이를 흙으로 채워 넣었다. 수리를 담당하는 관리는 저수지 관리뿐 아니라 방천이 견고한지 여부를 살피고 관리해야 했다.

방천은 특히 하천 연안의 저습지를 농지로 개간할 때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수리시설이었다. 또한 제언, 보 등의 수리시설과 마찬가지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축조해야 할 시설이었다. 농업사회에서 방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방천을 만드는 데 공로를 세운 사람을 포상하고, 방천을 축조할 수 있는 부지를 찾는 데 힘을 쏟았다.

논밭 인근의 방천은 논밭의 주인들이 힘을 모아 쌓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힘이 모자랄 경우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조력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백성들을 함부로 동원하여 방천을 만들 경우 이는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역이 되기도 하였다. 권세가들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천을 만들고 그 혜택을 자신의 농장(農庄)만 오로지 받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방천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음력 5월 단오와 6월 유두 사이에 함경북도 종성(鍾城)에서 행하던 부녀자들의 야외놀이를 방천놀이라고 한다. 이 지방은 봄이 짧아서 강물이 풀리자마자 훈풍이 불고 곧 진달래꽃이 진다. 그러면 점차 초여름 기운이 돌고 녹음과 방초가 한꺼번에 우거진다. 이런 계절적 특성 때문에 이곳에서는 화전놀이 대신 방천놀이가 성행하였다.

참고문헌

  • 문중양, 『조선후기 수리학과 수리담론』, 집문당, 2000.
  • 이광린, 『이조 수리사연구』, 한국문화총서 8, 한국연구원, 1961.
  • 이태진, 「16세기의 川防(洑) 관개의 발달」,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 이태진, 「조선 초기의 수리정책과 수리시설」, 『이기백 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 최원규, 「조선후기 수리기구와 경영문제」, 『국사관논총』39, 1992.
  • 宮嶋博史, 「李朝後期の農業水利-堤堰(溜池)灌漑を中心に-」, 『동양사연구』41-4,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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