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보(防垣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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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종성도호부에 소속된 만호진.

개설

방원보는 관방시설로, 1441년(세종 23)에 처음 설치되었다. 1448년(세종 30)에는 만호진이 폐지되었는데, 세조대에 다시 만호를 파견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조선을 괴롭혔던 니탕개(泥湯介)의 난은 방원보 전투에서의 승리로 제압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방원보는 동관(潼關)에 합쳐지면서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방원보는 종성에 속한 요해처 7곳 중의 하나였다. 『제승방략』에 따르면 방원진에서 북쪽으로 35리(약 13.7㎞)를 가면 종성진에 도달한다. 남쪽으로는 세천보(細川堡)와 25리, 고령진과는1식(息) 15리, 즉 45리(약 17.7㎞) 떨어져 있다. 회령진과는 70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행영(行營)과 1식 15리 거리에 위치해 있다. 『만기요람』에는 방원보가 종성부의 남쪽 22리(약 8.6㎞)에, 정약용의 『대동수경』에는 고령의 북쪽 40리(약 15.7㎞)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변천 및 현황

방원보가 세워진 것은 1441년(세종 23) 1월 29일이다(『세종실록』 23년 1월 29일). 방원보는 본래 만호진이었으나 1448년(세종 30) 11월에 혁파되고 천호(千戶)가 맡게 되었다. 우의정황보인(皇甫仁)이 방원보가 행성(行城) 안에 있고 또 절제의 진영에도 가깝다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30년 11월 13일).

반면, 방원보가 적로의 요해처임에도 본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침입이 일어난다면 구원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1462년(세조 8)에 다시 방원보에 만호가 파견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17일). 1488년(성종 19) 2월에는 방원보에 성을 쌓았다(『성종실록』 19년 2월 30일).

한편, 1583년(선조 16) 5월에 적호 5천여 기병이 방원보를 침입하였다. 이때 만호최호(崔浩) 등이 조전장 이천(李薦)·이영침(李永琛) 등과 강한 쇠뇌[弩]로 사격하여, 적이 예기가 꺾여 물러갔다. 그 후에 율보리와 니탕개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재차 방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 이발 등과 함께 성에 올라 힘껏 싸웠고 우후장의현(張義賢)과 판관윤담(尹湛) 등이 종성부에서 와서 구원하여 안팎으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갔다.

7월 19일에는 적호 2만여 기가 방원보를 포위했다가 물러난 일이 있었다. 당시 방원보 조방장은 이발이었는데, 적을 추격하여 적의 머리 1급을 베었다고 한다(『선조실록』 16년 8월 1일). 방원보 전투에서 패한 번호는 더 이상 조선을 침입하지 않았다. 결국 이 전투를 계기로 1583년(선조 16) 정월부터 지속되어 왔던 니탕개의 난은 종결되었다. 『제승방략』에 따르면 토병이 82명이고, 남쪽 지방에서 부방하는 군사가 59명이었다. 1883년(고종 20) 11월 23일 방원보는 동관에 합쳐졌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형태

방원보는 남동쪽으로 산맥이 발달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하천이 흘렀다. 즉, 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 전체가 천연 장애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1488년(성종 19) 2월에는 방원보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8척(약 2.1m)이고 둘레가 2,435척(약 738m)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방원보는 돌로 쌓았고, 둘레는 2,488척(약 754m)에 높이는 7척(약 2m)이라고 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2,668척(약 808m)이며, 여장(女墻)이 135곳이고, 옹성(甕城)이 3곳이며, 곡성(曲城)은 10곳이다. 문은 동문, 서문, 남문이 있으며, 천정(泉井)은 2곳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니탕개(尼湯介)의 난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수경(大東水經)』
  • 윤호량, 「선조 16년(1583) ‘尼湯介의 亂’과 조선의 대응」, 『군사』8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