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생원진사방(放生員進士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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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시와 진사시의 합격자에게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나누어 주는 일.

개설

생원진사시의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을 출방(出榜)이라 하였다. 출방 이후에 합격 증서인 백패를 수여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하며 이때 행하는 의식을 방방의(放榜儀)라 하였다. 생원진사방방의(生員進士放榜儀)는 조선초에 국가 의례가 정비될 때 갖추어져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되어 있었다. 오례 중 가례(嘉禮)에 속하였다. 조선초에 정비된 내용은 별다른 변화 없이 후기까지 이어져 왔다.

연원 및 변천

문무과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수여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수여하였다. 처음에는 문무과 급제자에게만 홍패를 수여하고 생원시 합격자에게는 패를 주지 않고 왕이 방목만 나누어 주었다(『세종실록』 1년 2월 8일).

조선초에는 진사시 없이 생원시만 실시하여 생원방방만 거론되었다. 1435년(세종 17)에 예조에서 생원 방방의주(放榜儀注)를 수정하여 바쳤고(『세종실록』 17년 2월 25일), 1438년(세종 20)에 생원·진사도 벼슬을 하게 되면 문음(門蔭)과 같으니 패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백지 반 폭의 백패를 주기 시작하였다(『세종실록』 20년 3월 13일).

단종대 진사시가 다시 실시된 후에는 생원방방에 의거하여 진사방방을 시행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의 시험은 하루걸러 실시하였으나 방방은 같은 날에 시행하였다. 세종대 정비된 생원진사방방의는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서 내용이 보다 정비되어 조선조 과거 의례의 근간이 되었다.

절차 및 내용

생원진사시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가 정해지면 이들을 대상으로 성적 등급인 과차(科次)를 정하였다. 과차가 정해지면 방(榜)을 붙여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이를 출방이라 하였다. 출방 후에 왕이 참석하는 자리에서 절차에 따라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하는데 이를 방방이라 하였다.

조선초 약 60년간은 생원시만 실시되었다. 생원시를 설행하고 방방을 하였다는 기록은 태조대부터 보였다. 1396년(태조 5) 6월에 이수(李隨) 등 99명을 뽑고 방방을 하였으며(『태조실록』 5년 6월 1일), 1414년(태종 14) 2월에 조서강(趙瑞康) 등 100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으나(『태종실록』 14년 2월 10일) 방방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생원시 합격자에게는 패를 주지 않고 방목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생원시방방의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대에 와서였다. 1435년(세종 17)에 예조에서 생원 방방의주를 수정하여 바치면서(『세종실록』 17년 2월 25일) 생원방방의 의식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태종이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두고 정비하기 시작한 국가 의례는 세종대의 『세종실록』「오례의」와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의』를 거치면서 의례로서의 기틀이 잡혔다. 생원진사방방의도 『국조오례의』의 내용이 이후 조선 과거 의례의 근간이 되었다.

방방은 왕이 참석하여 왕의 이름으로 홍패와 백패를 주는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왕이 참석하는 국가의 모든 행사에는 의식이 따랐다. 오례 중 가례(嘉禮)에 속하는 방방의에는 문과방방의·무과방방의·생원진사방방의가 있었다. 문과와 무과방방의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거행되며, 생원과 진사방방의도 마찬가지였다. 문무과방방의에는 종친과 문무백관이 함께 참석하고, 생원진사방방의에는 백관이 참석하지 않았다. 합격자의 부모나 친척들은 참관할 수 있었다.

생원시방방의와 진사시방방의가 같이 시행된 것은 1454년(단종 2) 진사시가 다시 실시되어 생원시와 진사시가 같이 설행되고부터였다. 시험은 하루 간격으로 설행되었으나 방방은 따로 하지 않고 함께 거행하였다. 이는 생원과 진사를 따로 뽑을 경우, 방방과 유가(遊街) 등으로 유생들이 수십일 동안 한성에 머물러야 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문종실록』 2년 4월 4일).

생원진사시의 방방은 대체로 출방 후 5~10일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백패의 양식은 『경국대전』 「예전」 백패식조(白牌式條)에 정해져 있었다. 교지로 내리는 백패에는 입격자의 관등과 성명, 생원 또는 진사시에 입격 등위를 기재하고 보인(寶印)과 날짜를 기입하였다.

방방의의 기본 구조는 사전의 행사장 준비, 행사 당일에 시험 관련 관리들의 집합, 참석자들의 자리 배치, 행사장 입장, 왕 행차, 행례, 합격증서 수여, 왕 환궁, 퇴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방방의가 있기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방안(榜案)·백패안(白牌案)·향안(香案)을 각각 자리에 설치하였다. 전악서(典樂署)에서는 의식에 필요한 음악을 연주할 악대와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휘(麾)를 설치하였다.

방방의 당일에는 시작에 앞서 참석자들의 자리를 각 품등에 맞게 정해진 자리에 설치하였다. 의식에 참여하는 관원들과 합격자들은 모두 복식을 갖추고 정해진 자리에 모여 대기하였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면 의례를 맡은 관원들이 각자 자리에 나아가고, 합격자들이 들어오고,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왕이 어좌에 올랐다. 왕에게 4번 절하여 예를 올리고 의식을 시작하였다.

생원방방관은 동쪽에, 진사방방관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창방관이 생원 합격자와 진사 합격자를 하나씩 교대로 부르면 생원은 동쪽, 진사는 서쪽에서 각각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부복(俯伏)하였다. 왕에게 국궁사배(鞠躬四拜)를 올리면 예조 정랑이 백패를 나누어 주었다. 합격자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면 왕이 주과(酒果)를 내렸다.

조선초에는 주로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방방의를 거행하였다. 근정전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난 후에는 명정전(明政殿)·선정전(宣政殿)·인정전(仁政殿)·숭정전(崇政殿) 등에서 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되고 왕이 경복궁으로 옮겨 간 후에는 다시 근정전에서 거행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방방의에 참석하는 합격자들은 청의(靑衣)를 입고 연두건(軟頭巾)을 썼다. 방방이 끝나면 생원·진사들은 악사·광대·재인을 동반하고 3일 동안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이를 유가(遊街)라 하였다. 지방 출신 생원·진사들은 고향에 돌아가면 수령이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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