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곡지금(防穀之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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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나 지방관이 풍흉과 기후의 변화에 따라 곡물이 타지방이나 외국으로 반출되어 가격이 급등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판매와 유통을 통제하던 정책.

개설

조선후기의 서울과 대도시들은 곡물 소비를 농촌 지역으로부터의 무곡(貿穀)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대지주나 상인들이 미곡을 상품화하면서 대규모 곡물 수요가 존재하던 서울과 대도시, 혹은 흉년이나 흉작으로 곡물이 부족한 지방으로 다른 곳의 곡식을 운송해 와서 이득을 취하는 행위가 나타났다. 이들의 곡물 유통은 유출 지역 내 물가의 등귀현상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 지방관은 관할 지역의 안정적인 곡물 공급을 확보하고 가격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방곡(防穀)을 실시하였다. 방곡은 관청의 허락 없이 곡물을 타 지역으로 반출할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당시의 방곡은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으며 지방에서 방곡을 시행할 경우 서울의 곡물 가격이 등귀할 것을 우려한 정부에서 반대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년 9월 2일). 1858년(철종 9) 우의정조두순도 방곡이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1876년(고종 13)의 개항부터 1904년(광무 8)까지 일본 상인의 국내 시장 침투 이후 약 100여 건의 방곡령이 실시되었다. 당시 외국 상인 중 곡물을 사들여서 수출하는 것은 일본인이 다수였고 곡물의 수출 지역도 주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산업자본주의 체제로 변모하면서 값싼 노동력과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저렴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곡물이 필요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일본 상인은 개항장과 외국인이 통상을 할 수 있는 조계지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하면서 일본 곡물보다 저렴한 조선의 곡물들을 대량으로 매집하여 수출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곡물의 품귀 현상과 물가의 등귀가 나타나 지방관이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1899년(광무 3) 5월 황해도 관찰사조병철, 10월의 함경도 관찰사조병식이 내린 방곡령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방곡령은 한일 간 통상장정에 위반된다는 일본의 외교적 압력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였고 막대한 배상금도 지출하였다. 결국 배상금의 지불 이후 조선의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주저하게 되었고 일본 상인의 곡물 매집에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기후의 변화나 농작물 작황에 따라 곡물 생산량이 수요량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곡물 유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발동했다. 이것은 곡물의 안정적인 유통과 매매를 유도하기 위해 일정한 지역의 곡물 유출을 통제하는 것이다. 특히 개항 이후에는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이 국내 소비량의 부족을 야기하자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방곡령을 시행하였다.

내용

방곡령이 시행되면 해당 지역의 곡물 유통과 매매가 행정적으로 통제된다. 특히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따라서 상인들의 원성이 많았다. 개항 이후에는 외국과의 통상 마찰이 야기되었으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방곡령을 선포하기 전에 각국 정부에 통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를 들어 1901년 방곡을 시행할 때는 먼저 조칙(詔勅)을 내려 쌀을 항구로 실어 내어가는 것을 당분간 금지하며 항구로 들어오는 곡식에는 세금을 면제한다는 사실을 각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에게 공문을 띄우는 동시에 각 항만의 감리(監理)들에게도 통보하여 인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개항 이후 통상(通商)한 이래로 중앙과 지방의 형편이 달라져서 곡식의 유통을 장기간 행정력으로 금지하는 것이 상업 활동에 방해가 되었다. 오히려 방곡령을 내리지 않고 곡물의 유통이 잘되게 하여 시중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였다(『고종실록』 38년 10월 29일). 또한 방곡은 지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곡물의 유통을 유지하는 순기능만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곡으로 인해 지역민이 곡물을 구하지 못하는 폐단을 야기하기도 했다(『고종실록』 2년 9월 2일).

또한 방곡령은 한일 양국 간에 조인되었던 통상장정에 위반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1901년 탁지대신서리(度支部大臣署理) 탁지부(度支部) 협판(協辦) 이용익(李容翊)의 보고에 따르면, 함경도와 황해도의 방곡령으로 인해 조선 정부가 일본에 배상할 금액이 11만 원에 달했다(『고종실록』 38년 12월 12일). 그런데 당시 함경도 방곡령을 주도하였던 조병식(趙秉式)은 기근이 들어 황두(黃豆) 생산이 크게 감소하자 방곡령 문제를 외부와 협의한 후 시행하였지만, 외부에서 실상을 조사하지도 않고 일본 측 압력에 못 이겨 결국 배상을 하게 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따라서 당시 방곡령 사건은 방곡령을 시행한 지방관이 근대적 외교 관계나 법조문에 미숙하여 일어났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던 것이다(『고종실록』 38년 12월 28일).

변천

일본의 외교적 압력과 통상장정의 곡물 수출 규제 사항이 없는 상황에서 방곡령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간장과 조미료를 만들던 콩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보다 이익이 되는 농산물을 생산하고자 했다. 자연히 콩의 수입은 주로 조선에 의존하게 되었다. 쌀의 경우도 조선미의 판매가가 일본산의 1/3 수준이었으므로 조선으로부터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그만큼 조선의 입장에서는 조선 곡식의 대일 유출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자칫 지방관이 막대한 배상금을 무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점차 방곡령을 시행하지 않아 1900년 이후로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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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吉野誠, 「咸鏡道防穀令事件 -事件の發生-」, 『朝鮮文化硏究』 5,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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