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함례(飯含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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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반함례 |
한글표제 | 반함례 |
한자표제 | 飯含禮 |
관련어 | 상례(喪禮) |
분야 | 왕실/왕실의례/흉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반함례(飯含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9년 12월 5일 |
상례(喪禮)에서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珍珠) 또는 옥이나 동전을 물리는 의식.
개설
상례에서 임종을 당한 시신을 목욕시키고 습의를 입힌 후에 반함례를 거행한다. 국장(國葬)에서는 반함 때 시신의 입안에 쌀과 진주를 물렸다. 이 의식은 돌아가신 부모의 입을 차마 비어둘 수 없는 효자의 마음에서 비롯하였다. 그리고 재생을 기원하는 신앙과도 연관이 있다. 국장이 발생했을 경우 조선전기에는 내시(內侍)가 입에 물렸으나 숙종대부터 왕이 직접 하거나 왕세자가 거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숙종실록』 9년 12월 5일)
연원 및 변천
반함은 중국 고대의 상례 절차 중 하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는 고인의 입속을 차마 비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거행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입속에 넣는 것은 음식과 장식품이다.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서는 사(士)를 위한 반함으로 쌀과 조가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위 또는 시대에 따라 반함의 내용물이 달랐다. 쌀 대신에 군주는 기장, 대부는 피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익히지 않고 생채로 넣는 것이다. 이는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 화식(火食)을 하지 않던 원시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의식은 음식을 배불리 먹이는 것보다 아름답고 정결한 것을 바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이것은 곡식과 함께 넣는 장식품에서 잘 나타난다. 천자는 진주, 제후는 옥, 대부는 고리모양의 옥구슬인 벽(璧), 사는 조가비[貝]를 입에 넣었다. 주(周)나라 또는 한(漢)나라 무덤에서는 반함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매미 모양의 옥(玉)이 자주 발견되었다. 이런 사례를 보건데 반함의 전통은 죽음 이후 재생의 염원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한편, 조가비의 사용은 원시시대 조가비를 화폐로 사용한 것에서 연유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나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밥과 함께 동전을 넣었다.
절차 및 내용
국장에서는 임종이 확인되면 혼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복(復)’을 세 번 외치는 복의 절차 이후 곧바로 입 안에 각사(角柶)를 치아 사이에 끼운다. 각사는 뿔로 만든 숟가락 형태의 물건인데 입이 완전히 다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안에 물리는 것이다. 그러고 난 후 시신을 목욕시키고 습의를 입힌 후에 반함을 거행하였다. 이때 필요한 쌀과 진주는 각각 사도시(司䆃寺)와 상의원(尙衣院)에서 준비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내시가 손을 씻고 대행왕의 입에 진주와 쌀을 넣었지만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왕세자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왕세자가 손을 씻고 대행왕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 의정(議政)이 입쌀과 진주를 준비하여 따라 들어갔다. 내시가 대행왕의 베개를 치우고 입안에 물렸던 각사를 빼내었다. 왕세자가 대행왕이 누워있는 평상의 서쪽으로 가서 동향하여 앉으면 반대편에 있는 내시가 얼굴을 가린 수건을 들쳤다. 이에 왕세자가 은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입 안 오른쪽에 채우고, 아울러 진주 하나를 넣는다. 왼쪽과 가운데도 이와 같이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반함은 국장이 아닌 사가의 상례에서도 거행하는 절차이다. 다만 『주자가례』나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는 반함 때 쌀과 동전을 넣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전은 귀한 것을 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저승길에 필요한 노잣돈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사례편람(四禮便覽)』
- 『주자가례(朱子家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