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교(泮水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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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의 반수(泮水) 위에 놓였던 다리.

개설

반수는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국학인 반궁(泮宮)의 옆으로 흐르는 물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은 주대의 반수를 모방하여 성균관의 동문과 서문 사이로 물을 흐르게 하고 이름을 반수라고 하였다. 반수 위에 다리를 세우고 반수교 혹은 반교라고 하였다. 『태학지』에 실린 「반궁도」에는 향석교(香石橋)로 되어 있다. 왕의 알성(謁聖)이나 왕세자의 입학례가 있을 때 참석한 관원들이 이 다리 위에서 행사를 구경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종대에 유생들이 반수를 설치하여 목욕하는 곳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원각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로 성균관을 옮겨 지을 때에, 반수는 마른 내이므로 물 없이 짓기로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0일).

조직 및 역할

왕이 알성을 할 때, 기일 전에 유사(有司)가 길을 깨끗이 치우고 반수교 문에서부터 마을 어귀까지의 큰길 곁에 백포장(白布帳)을 설치하였다. 반수교 근처에는 군막이 무수히 설치되었는데 대개 백관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왕세자가 입학례를 행하고 경서를 강독할 때 백관들이 반수교 근처에 둘러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

변천

1742년(영조 18) 영조는 후세로 하여금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라는 내용을 새긴 탕평비를 반수교 위에 세우게 하였다. 비문은 ‘원만하여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이요, 편벽되고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심이다[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스무 글자이다[『영조실록』 18년 3월 26일].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