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성(朴弼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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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필성 |
한글표제 | 박필성 |
한자표제 | 朴弼成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영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사홍(士弘) |
호 | 설송재(雪松齋) |
봉작 | 금평위(錦平尉) |
시호 | 효정(孝靖) |
출신 | 양반/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652년(효종 3) |
사망 | 1747년(영조 23) 7월 10일 |
본관 | 반남(潘南)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호(朴濠) |
조부 | 박세모(朴世模) |
부 | 박태장(朴泰長) |
모_외조 | 광주 김씨(光州金氏):김영후(金榮後)의 딸 |
형제 | (형)박필진(朴弼震), 박필신(朴弼臣), 박필근(朴弼根) |
처_장인 | 숙녕옹주(淑寧翁主) : 효종(孝宗)의 딸 →(자녀)1녀 |
작품 | 「숙빈최씨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필성(朴弼成) |
총론
[1652년(효종 3)~1747년(영조 23) = 96세]. 조선 중기부터 후기인 효종(孝宗)~영조(英祖) 때의 문신이자, 효종의 부마. 봉작(封爵)은 금평위(錦平尉)이며, 자는 사홍(士弘)이고, 호는 설송재(雪松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도정(都正)박태장(朴泰長)이고, 어머니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참봉(參奉)김영후(金榮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세모(朴世模)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호(朴濠)이다. 부인은 효종의 후궁 이안빈(李安嬪)의 소생 숙녕옹주(淑寧翁主)이다.
효종~숙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8월 효종의 딸인 숙녕옹주와 결혼하여 금평위에 봉해졌다.[『현조실록(顯宗實錄)』효종 3년 8월 4일] 그러나 1668년(현종 9) 5월 숙녕옹주는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딸 하나를 두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9년 5월 20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81 「능지(陵誌)」]
박필성(朴弼成)은 숙종(肅宗) 대에 여러 차례 사은정사(謝恩正使)로 뽑혀서 청(淸)나라에 다녀오는 등 뛰어난 외교 역량을 보였다. 1680년(숙종 6) 5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뽑혔으며, 1685년(숙종 11) 8월에는 사은정사로 부사(副使)윤지선(尹趾善) 및 서장관(書狀官)이선보(李善溥)와 함께 청(淸)나라에 갔다 왔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6년 5월 7일, 숙종 11년 8월 15일, 숙종 11년 8월 16일] 1703년(숙종 29) 9월에도 사은정사로서 부사서문유(徐文裕) 및 서장관이언경(李彦經)과 함께 청나라에 갔으나, 선천(宣川)에 도착하였을 때 병세가 위중하였으므로 여산군(礪山君)가 교체되어 돌아왔다.[『숙종실록』숙종 29년 9월 21일, 숙종 29년 10월 17일] 61세가 되던 1712년(숙종 38) 2월에도 사은정사로서 부사민진원(閔鎭遠)과 서장관유술(柳述)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가 그 해 7월에 돌아왔다.[『숙종실록』숙종 38년 2월 22일, 숙종 38년 7월 26일] 그리고 1717년(숙종 43) 12월에는 부사이관명(李觀命) 및 서장관이정주(李梃周)와 함께 사은정사로서 청나라에 갔다가 그 다음 해 돌아왔다.[『숙종실록』숙종 43년 12월 26일]
영조 시대 활동
영조 대인 1738년(영조 14) 2월 그가 수연(壽宴)을 설행(設行)한다는 말을 듣고 영조는 장악원(掌樂院)의 풍악(風樂)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장수를 치하하여 시를 지어 내리니, 한 때의 경상(卿相)들이 연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4년 2월 30일] 그가 90세가 되던 1741년(영조 17) 1월에는 나이가 90세이고, 또 효종의 부마라고 하여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영조로부터 후하게 하사받았고, 그 해 7월에는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영조실록』영조 17년 1월 19일, 영조 17년 7월 23일] 그 뒤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는데, 1746년(영조 22) 1월 1일에는 그가 영릉도위로서 나이가 95세였기 때문에 특별히 넉넉한 상을 하사받았다.[『영조실록』영조 22년 1월 1일]
이듬해인 1747년(영조 23) 7월 10일 그는 효종의 부마로서 효종과 현종(顯宗), 숙종, 경종(景宗), 영조 등의 다섯 조정을 섬기고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96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직접 가서 조문하려고 하였는데, 약원(藥院)에서 간하여 중지하였다.[『영조실록』영조 23년 7월 10일]
한편 그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의 소령원(昭寧園) 입구에 있는 「숙빈최씨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의 비문을 썼다.
시호는 효정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47년(영조 23) 8월 영의정김재로(金在魯)의 권의에 따라 그의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영조실록』영조 23년 8월 22일]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명재유고(明齋遺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