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현(礡石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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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서 돈의문을 통과해 서북 지역으로 향하는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길에 있던 고개.

개설

박석현(礡石峴)은 한양 도성의 북부 연은방(延恩坊)에 속했던 박석동(礡石洞)에 있던 고개이다. 영조대에는 박석대로(礡石大路)라고도 했다. 도성의 서북부 지역인 고양에 위치한 서오릉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내용

박석현을 지나는 도로는 의주로였다. 의주로는 모화관에서 시작하는 파발(擺撥)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중국을 왕복하던 사행(使行)과 칙사(勅使) 일행이 도성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던 길인 의주대로상에 위치하여, 한양 도성의 주요 간선 도로상에 있던 고개이다. 또한 왕실의 능침인 서오릉이 인근에 있어서 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행할 때 반드시 거치던 능행로(陵幸路)였다.

명칭 유래

박석현은 박석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개가 서오릉으로 이어지는 풍수상의 중요한 지맥(地脈)이 있는 곳으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박석을 깔았다는 설과, 인근 주민들이 생활의 편리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도 역사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전기인 문종대에 능행을 할 때 헌릉(獻陵)과 영릉(英陵)의 지맥을 상할 수 있다는 지관들의 의견에 따라 박석을 깔자는 논의가 있었으므로(『문종실록』 1년 10월 16일), 풍수상의 이유로 해석할 여지는 보인다.

자연 환경

동쪽에는 삼각산이 있으며, 서쪽에는 낮은 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남쪽에는 하천이 흐르는 낮은 저지대이다.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른다.

형성 및 변천

일제강점기 이후에 고개의 흔적이 사라지고 아스팔트 도로가 되었다.

위치 비정

오늘날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갈현동과 불광동·구파발동 사이에 있으며, 파주의 통일로와 연결된다.

관련 기록

인근에 서오릉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왕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1477년(성종 8)에 성종이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에 가서 제사를 거행한 뒤 융복(戎服)을 입고 박석현에서 사냥하여 노루와 토끼를 잡았다(『성종실록』 8년 9월 3일). 1761년(영조 37)에는 영조가 서오릉에 행행하다가 박석현의 능소(陵所) 인근에 도착하자 취라(吹螺)를 멈추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7년 8월 11일). 조선전기의 왕은 상무적 기질이 많았고, 후기에는 유교적 의례에 더 중요성을 두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