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民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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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란 |
한글표제 | 민란 |
한자표제 | 民亂 |
동의어 | 민요(民擾) |
관련어 | 홍경래란(洪景來亂), 진주민란(晉州民亂)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변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양식 |
발생장소 | 관서(關西), 진주(晉州), 삼남(三南) |
관련 인물/집단 | 홍경래(洪景來), 박규수(朴珪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란(民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 4년 3월 4일, 『순조실록』 12년 1월 3일, 『순조실록』 12년 3월 13일, 『순조실록』 12년 4월 15일, 『순조실록』 12년 4월 21일, 『철종실록』 13년 2월 29일, 『철종실록』 13년 3월 10일, 『철종실록』 13년 4월 4일, 『철종실록』 13년 4월 17일, 『철종실록』 13년 4월 22일, 『철종실록』 13년 5월 22일, 『고종실록』 12년 5월 1일, 『고종실록』 29년 12월 22일, 『고종실록』 30년 11월 1일, 『고종실록』 30년 11월 24일 |
조선시대에 농민층이 사회·경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일으킨 군현 단위의 집단 봉기.
개설
조선시대에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농민층이었다. 또한 국가 권력과 신분제 운영에 따라 소외된 서얼이나 중인층, 권력에서 밀려난 몰락 양반들도 지배체제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국가와 지주의 수탈이 가중되고 삼정 문란에 따른 농민층의 부담이 증가하면서, 공동의 저항 집단을 이루어 군현 단위로 집단 봉기하였다.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세(賦稅) 문제였다. 수령과 아전 및 토호들의 부세 수탈에 맞서, 농민층이 주축이 된 저항 세력은 군현 단위로 봉기하거나 군현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지역에서 농민항쟁을 일으키곤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홍경래란(洪景來亂)’으로 알려진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과 ‘진주민란’으로도 불리는 1862년 삼남 농민항쟁이다.
민란은 개항 이후 점차 증가하여 1892년 이후부터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빈발하였고, 결국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및 원인
조선시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대부분 토지에 긴박된 농민층이 부담하였다. 농민층은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고 군역과 환곡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였기 때문에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고통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민(流民)이 되어 광산으로 몰려가 광부가 되거나 산 속으로 피신하여 화전민이 되었다. 때로는 화적(火賊)이 되어 지배층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당시 농민층의 부담을 가중시켜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주로 수령-이·향수탈구조(守領-吏·鄕收奪構造)에서 자행된 부세(賦稅) 수탈이었다. 수령-이·향 수탈구조란 군수·현감과 같은 수령과 아전 및 지역 토호들이 한통속이 되어 농민층을 수탈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부세 수탈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당시 부세 제도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각 관청이 독자적으로 재정을 운영하였다. 따라서 각 관청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부세액을 늘리거나 새로운 세금 부과 명목을 신설하였다. 이로 인해 토지를 경작하면서 실질적인 세원 역할을 해오던 농민층은 부세 부담이 가중해지고,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생산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년째 자연재해가 누적되면서 농민층은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받는 궁핍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조선후기에는 세도정치가 확대 재생산되고 국가 권력이 특정 지역 양반층에 집중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하층 양반, 즉 향반(鄕班)·잔반(殘班)들도 출세의 길이 막혔다. 그러자 이들 역시 지배체제에 불만을 품고 경제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던 농민층과 뜻을 함께하게 된다.
조선후기에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크게 성장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봉건적인 신분제에 묶여 경제 활동에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이들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도 가혹하여, 이들 역시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체제 저항 세력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확대되었다. 이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배층의 권력 독점과 수탈, 국가 기구의 부패 등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 저항세력은 다양한 형태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한 불만은 18세기 중엽부터 사회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명화적(明火賊)과 같은 무장 집단의 활동이다. 이들은 토지를 빼앗긴 농민층으로, 집단을 이루어 보통 한밤중에 횃불을 들고 도적질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숙종대에 활동하던 장길산(張吉山) 일당이다.
몰락 양반과 같은 지식층은 합법적으로 불합리한 내용을 적은 고소장을 관에 제출하거나, 때로는 방서(榜書)나 벽서(掛書)를 깃발이나 담벼락에 붙여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19세기에 들어와 자주 발생하였는데, 1804년(순조 4)에는 서울 도성 4문에 ‘관서비기(關西秘記)’라는 벽보가 나붙기도 하였다(『순조실록』 4년 3월 4일)
반면에 일반 농민층은 집단 소송인 등소(等訴)를 관에 제출하거나,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거납(拒納) 등을 통해 문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이고 온건한 방식은 거의 대부분 지배층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농민층은 군현 단위로 집단 봉기하여 민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경과
17~18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던 기층민들의 불만은 19세기 들어와 군현 단위를 넘어 전국 단위로 표출되기 시작했으며 표출 빈도도 점차 많아져,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가 되었다. 1811년에 발발한 평안도 농민항쟁, 1862년 경상도 진주를 비롯해 삼남 지방에서 전개된 농민항쟁,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그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사이에는 크고 작은 군현 단위의 국지적 민란이나 병란(兵亂), 작변(作變), 항조항세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농민 저항이 전국에 걸쳐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 전반기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가장 많은 민란이 모의되거나 발생하였다. 평안도 농민항쟁은 광산 개발과 상업 활동으로 경제력을 다진 세력이 국가 수탈과 지역 차별에 저항하여 일으킨 저항 운동이었다. 홍경래 등은 평안도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9개 고을을 점령하였으나, 4개월 만에 진압되었다(『순조실록』 12년 1월 3일) (『순조실록』 12년 3월 13일) (『순조실록』 12년 4월 15일) (『순조실록』 12년 4월 21일).
평안도 농민항쟁 이후 50여 년간 큰 규모의 민란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농민층의 불만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세 제도의 모순에 따른 농민층의 불만은 더 커지고 있었다. 결국 1862년에 삼남 지방에서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발발하였다.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민란은 진주를 비롯해 경상도 20개 군현, 전라도 37개 군현, 충청도 12개 군현, 그리고 경기도와 함경도·황해도 일부 군현에도 일어났다(『철종실록』 13년 2월 29일) (『철종실록』 13년 3월 10일) (『철종실록』 13년 4월 4일) (『철종실록』 13년 4월 17일) (『철종실록』 13년 4월 22일)(『철종실록』 13년 5월 22일).
1862년에 폭발한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로 농민 부담이 완화되고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적극적으로 개혁 정책을 실시하면서 점점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결과 개항 이전에는 1875년 울산에서 발생한 민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민란이 없었다(『고종실록』 12년 5월 1일).
그러나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밑으로부터의 사회 변동은 가속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확대·발전하였다.
1단계는 개항 이후부터 1885년까지이다. 개항 초기만 해도 거의 발생하지 않던 민란은 임오군란(1882)에서 갑신정변(1884)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2단계는 1886년 이후부터 1889년까지이다. 이때는 사회가 다소 안정되면서 민란이 소강 국면이었다. 그러나 자연재해의 여파로 농민들의 생계가 곤란한 지경이 되자, 민란은 1880년대 말에 다시 폭증한다.
3단계는 1890년대 초이다. 이때부터는 민란이 전국적으로 만연해졌고, 특히 1892년 이후부터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빈도가 잦아졌다. 1893년의 경우 최소 65건 이상이 발생하였고 발생 지역도 황해도에서 삼남 지방으로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고종실록』 29년 12월 22일) (『고종실록』 30년 11월 1일) (『고종실록』 30년 11월 24일).
군현 단위의 민란이 일어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장시 수와 역참 수가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이는 민란 발생 지역이 확대된 교환 경제의 영향을 일찍 받아, 다른 지역보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했고, 이로 인해 농민층 분화가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장시와 역참을 통한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지역 안팎의 의사소통은 지역 주민들의 사회의식을 제고하고 현실에 대한 재해석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란이 일어나는 의식 기반이 되었다.
민란은 19세기에 들어와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 1862년 삼남 농민항쟁을 거치면서 확대되고,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민란은 전국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중세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밑으로부터 발생한 변혁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 김양식, 『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 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농민운동사분과 편,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경인문화사, 2002.
- 한국역사연구회 편, 『1894년 농민전쟁연구 : 18~19세기 농민항쟁』2, 역사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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